“와! 너 손톱 진짜 예쁘다야!”

by 진아

수업이 끝난 후 활동지를 걷고 있었다. 활동지를 내는 한 아이의 손가락에 반짝, 빛나는 무언가가 보였다. 다시 보니 네일아트를 한 손톱이었다. 순간 머릿속을 스친 느낌 그대로, 가감 없이 뱉은 말은 “와! 너 손톱 진짜 예쁘다야!”였다. 아이는 수줍은 듯 슬쩍 웃더니 손톱을 주먹 속에 말아 쥐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육아에 일에, 관리할 틈 없이 바짝 깎은 내 손톱이 초라하게 보일 만큼, 참 예쁜 손톱이었다.



신규 발령을 받았던 때부터 육아 휴직에 들어가기 전까지, 나는 ‘교칙’에 매우 민감한 교사였다. ‘교칙’에 민감하다는 의미는 교칙을 결정하는 과정에 민감하다는 의미도 될 것이고, 교칙을 지키는 일에 민감하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교직에서 만난 선생님들 가운데 교칙 제정에 무척 민감한 분들이 계셨다. 학생 인권이 침해받지 않는 선에서 교칙이 제정되도록 애쓰시는 선생님들을 보며 존경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딱 그까지였다. 나는 누군가가 정해놓은 교칙을 의심도 반감도 없이, ‘당연히 지켜야 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교사였다. 그렇다 보니 아주 민감하게 생활 지도를 하는 교사일 수밖에 없었다.


매 학기가 끝날 때마다 책장 서랍 정리를 하면 아이들에게 압수한 물품이 쏟아졌는데, 그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인 개수를 자랑한 것은 ‘틴트’였다. ‘화장을 해서는 안 된다’는 교칙에 위배되는 화장품이니 참 무자비하게도 빼앗았다. 아이들은 ‘샘, 얼마 전에 새로 산 건데요.’라며 애타게 매달리기도 했고, 눈을 흘기며 눈물을 뚝뚝 흘리기도 했다. 하지만 저희들도 교칙을 위배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결국엔 내 손에 틴트를 넘기고 교실로 돌아갔다. 수북하게 쌓인 틴트(를 비롯한 각종 화장품)는 학생 지도 과정에서 내게 남은 전리품이었다. 그걸 보며, 나는 아주 열심히 학생 지도를 하는 꽤 성실한 교사라 자부했던 적도 있다.

5년 만에 복직한 학교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자유로운 머리 모양이었다. 중단발을 찰랑거리며 복도를 지나는 남학생을 보며 흠칫 놀라기도 하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의 여학생이 너무 예뻐서 몇 번이고 뒤돌아보기도 했다. 뽀글거리는 펌을 한 아이나, 아주 밝은 색으로 염색을 한 아이는 없었지만 딱 봐도 아이들의 두발은 자유로운 편이었다. 마스크가 일상화되면서 화장 여부를 단속하는 분위기도 사라진 듯했다. 학교 교칙(규정)을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아이들의 복장이나 두발, 화장이나 손톱 등이 많이 자유로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쉬는 시간 내내 곱게 단장된 아이의 손톱이 잊히질 않았다. 매니큐어 바르는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몇 년 전만 해도 그렇게 아이들을 쥐 잡듯이 잡으며 ‘단속’에 열을 올렸나 싶었다. 고백하자면, 과거의 ‘나’가 부끄럽게 느껴졌다.


‘정해진 교칙을 지켜야 한다.’에 몰두하는 동안에는 한 번도 ‘왜 아이들의 꾸밈이 허용되면 안 되는 걸까.’라는 고민을 해보지 못했다. 아니, 고민하지 않았다. 학생이면 당연히 ‘학생다워야 한다’고 여겼고, 내 머릿속 ‘학생다운’ 모습은 단정한 머리에 화장기 없는 얼굴에 손대지 않은 교복을 입은 모습이었다. 두 개념이 너무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의심조차 안 했다.


십 대 후반, 자기 외모에 민감도가 아주 높아지는 시기다. 남들은 알아보지도 못할 아주 작은 뾰루지 하나에 외출도 포기할 만큼, 외모에 관심이 지대한 때이다. 그런 아이들에게 ‘지금이 제일 예쁘다, 지금은 아무것도 안 해도 예쁘다, 있는 그대로가 예쁘다’라는 말이 과연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그리고 ‘화장하는 시간에 공부해라’는 말은…… 안 하는 게 진리다.


외모에 관심이 지대한 아이는 나쁜 아이일까. 정말 학생답지 못한 아이일까. 아무리 학교 생활을 열심히 하더라도 외모에 관심이 높은 아이라면 학생답지 못한 아이일까. 학교 생활을 열심히 하는 아이라면 외모에 관심이 덜한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 걸까. 도대체 '학생답다'는 말의 의미는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 걸까. 제 손톱 하나, 제 머리 길이 하나, 제 얼굴 하나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아이가 과연 무엇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을까. '학생답다'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 나는 '교사다운'가. '어른다운'가.


내 안에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고민하지 않던 지점을 고민하면서 보이지 않던 아이들의 세계가 보인다. 왜 보이지 않았을까. 나도 지나온 세계였는데. 말도 안 되게 부당하다 생각한 세계였는데.




모순의 극치인 과거를 고백하자면,

나는 수능 시험장에도 아이참(쌍꺼풀 테이프)을 붙이고 간 애였다. (잠을 못 자서였는지, 잠을 푹 자서였는지, 그날따라 눈이 퉁퉁 부어서 얇디얇은 속쌍꺼풀이 사라진 바람에 수능 시험날 아침에 쌍꺼풀 테이프를 붙였다. 그런 아이였던 내가, 어른이 됐다고 입을 싹 씻었다니.) 나한테 틴트 뺏겼던 아이들이 들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분개하겠지. 미안하다. 얘들아.

(아이참에 대해서는 언젠가 한 번 제대로 써보겠다. 나의 외모 변천사에 큰 영향을 미친 녀석이라, 한 번은 제대로 다루어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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