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전화와 수업의 공존

by 진아

쉬는 시간이 몇 년 전만큼 시끄럽지 않다. 오히려 조용히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휴대전화에 코를 박고 게임을 하거나 SNS를 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수업종이 치고 교실에 들어가면 여럿이 모여 수다를 떠는 아이들의 모습보다, 여럿이 모인 채 각자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는 아이들이 더 많다. 처음엔 너무 삭막한 게 아닌가 했었지만, 이제는 제법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좋다 나쁘다 평가하지 않고, 현재 아이들이 과거의 아이들과는 달라졌음을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5년 전만 해도 학생들이 휴대전화를 (교내에서) 소지하는 것은 금지였다. 등교 후 아침자습시간이 시작되기 전 아이들은 교탁에 놓인 휴대전화 수거 가방에 휴대전화를 모두 내야 했다. 자기 번호가 쓰인 칸에 휴대전화를 꽂아두었기 때문에 담임교사는 매일 아침 누가 휴대전화를 냈는지, 내지 않았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등교는 했는데 휴대전화를 내지 않은 아이가 있다면 반드시 확인을 해야 했고, 매일 휴대전화를 내던 아이가 그날따라 ‘휴대전화를 가져오지 않았다’라고 말하면 괜한 의심의 눈초리를 한 번은 보내야 했다.

아이들에게서 휴대전화를 수거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수업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휴대전화를 내지 않는 아이들이 있었다. 수업 시간에 사용하지 않으면 크게 들킬 일이 없었으니, 가져오지 않았다고 말하고 내지 않으면 확인할 길은 없었다. 가끔 쉬는 시간에 전달사항이 있어서 교실에 갔다가 버젓이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있는 아이들과 마주칠 때면 저희들이나 나나 곤혹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서로 보지 않아야 할 것, 보이지 않아야 할 것을 본 그 순간의 어색함이란. 결국 교칙대로 휴대전화를 ‘압수’하고 나면 언제나 떫은 감을 깨문 것 같이 뒷맛이 썼다.


지금의 아이들은 휴대전화를 내지 않는다. 즉 교내에서 휴대전화를 소지하는 일이 허용되었다는 말이다. 다른 학교에 근무하는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모든 학교가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상당수의 고등학교에서는 휴대전화 소지를 허용하는 듯하다. 코로나로 한동안 학교가 멈추었고, 수 달만에 재개한 등교 수업에서 개인 휴대전화를 한 곳에 모아 보관하는 것에 대해 우려가 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수업이나 과제가 온라인에서 시행되는 상황에서 휴대전화를 걷는다는 건 어딘지 앞뒤가 맞지 않았을 것이다.




첫 수업에 들어가기 전까지 나는 좀 두려웠다. 휴대전화를 들고 있는 아이들과 어떻게 수업을 해나가야 할지 막막했다. 아이들의 주의 집중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아서 수시로 휴대전화로 눈이 향할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매 수업마다 ‘휴대전화 넣어라, 휴대전화 보지 마라’ 등의 말로 에너지를 소진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 말라고 하더라도 할 아이는 반드시 할 것이므로 매시간 아이들과 실랑이를 벌일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팠다. 맞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휴대전화와 수업이 공존할 방법을 찾지 못한 상황이었다.


3월, 대망의 첫 수업 시간. 중대선언을 하는 심정으로 아이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휴대전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반드시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요. 샘도 집에 아이들이 어리기 때문에 휴대전화를 수업에 들고 들어올 겁니다. 혹시라도 아이들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다면 엄마인 저에게 연락이 올 거거든요. 교탁에 올려둘 것이고, 앞서 말한 부득이한 상황이 아닌 경우에는 휴대전화를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 여러분에게도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수업 중에 휴대전화를 꼭 사용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책상 위에 올려둔 상태에서 빨리 해결하고 다시 수업으로 돌아오길 바라요. 책상 밑으로 손을 넣어 숨겨서 사용하는 건 절대로 안 됩니다. 이건 선생님과 여러분 사이의 신뢰의 문제예요. 우리가 서로를 신뢰한다면 휴대전화가 있어도 수업에 큰 방해가 되지 않으리라 믿어요.”


그 말을 하기까지 고민이 많았지만, 아이들에게 제대로 사용해야 할 순간과 자제해야 할 순간을 알려주면 되는 것이라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휴대전화는 공존해야 할 대상이었다. 성인도 휴대전화를 들고 업무를 보고, 책을 읽고, 강의를 듣지 않는가. 나도 수업시간을 제외하고는 휴대전화를 손에서 거의 놓지 않는 편이라 아이들의 입장이 너무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6월이 되었다.


아직까지 한 번도 휴대전화 때문에 아이들과 얼굴을 붉힐 일은 없었다. 아이들이 휴대전화를 사용할 때 모른 척 넘어갔다는 말이 아니다. 따로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휴대전화를 책상 서랍이나 가방에 넣어둔 아이들이 많았다. 상당수의 아이들 책상에 휴대전화가 놓여 있기도 했지만, 지적해야 할 만큼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아이들은 없었다. 아이들은 자제했다. 가끔 해야 할 학습량을 채우고 나면 휴대전화를 보는 경우도 있었지만, 잠시였다. 가끔 휴대전화에 심취해있는 아이를 보면 이건 우리의 약속을 어긴 것이니 이번 시간에는 교탁 위에 올려두겠다고 했다. 아이들은 민망한 듯 웃으며 직접 교탁 위에 휴대전화를 올려두었다.


오히려 수업에서 영상을 보거나 특정 앱을 활용할 경우가 생기면 휴대전화를 들고 있는 게 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보라는 것을 안 보고 딴 것을 볼까 봐, 그래서 수업이 내 ‘통제’의 바깥으로 밀려날까 봐 걱정했던 과거가 민망하게 여겨질 만큼. 아이들은 스스로의 욕구를 통제하며 수업에 참여했다.

요즘 들어 자주 하는 생각이, 보통의 아이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스스로의 삶에 대해 고민하고 자신의 욕구를 통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전엔 단순히 ‘가르쳐야 할 대상’으로 보이던 아이들이 ‘저마다의 삶의 무게를 짊어진 한 인간’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더 어렵다. 이 아이들을 어떻게 대해주어야 할지. 답하기 어려운 고민만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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