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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Jun 19. 2022

기말고사를 앞두고, 불안하다 말하는 아이를 보며.

올해는 담임교사가 아니다 보니 아이들과 1:1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거의 없다. 수업으로 일주일에 두 번씩 만나는 게 전부이니, 아이들의 내밀한 속내를 듣게 되는 일은 애써 만들지 않는 한 없는 일이다. 가끔 수업이 조금 일찍 끝나거나(그래 봐야 2~3분 내외지만), 복도에서 스치듯 만날 때 아이들에게 수업 외적인 이야기를 한두 마디 묻는 게 전부이다.   

   

며칠 전, 한 반의 수업이 끝나고 종이 치기까지 2분 정도 시간이 남아 있었다. 아이들은 교과서를 정리하거나 엎드리거나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았다. 나도 교탁을 정리하는데, 제일 앞자리에 앉은 한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수업이 끝남과 동시에 문제집을 꺼내 풀 채비를 하고 있었다. 꽤 성적인 좋은 아이였다.     


“기말고사 다 되어가서 힘들지?”

“쌤, 너무 불안해요...”

“많이 불안해? 등급 때문에?”

“네, 저 아슬아슬해서. 실패하면 어쩌죠.”

“하아... 그래, 불안하겠다...”     


그 아이는 중간고사 성적이 1,2등급의 경계에 있다고 했다. 등급은 학기에 한 번씩 나오지만, 중간고사가 끝난 후 아이들은 예상 등급을 받은 모양이었다. 특히 최상위권 아이들끼리는 벌써 치열한 성적 경쟁이 시작된 듯했다. 1학년 전교생이 200명이라고 할 때, 4%에 해당하는 1등급은 8명만 받을 수 있으므로 ‘내가 8등 안에 드느냐, 못 드느냐’를 가늠하며 늘 ‘불안’하다고 했다.     


불안하다고 말하며, 아이는 쓰게 웃었다. 해주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시험 한 번에, 등급 하나에 ‘실패’ 하지는 않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불안해하지 않아도 잘 해낼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너 정도면 정말로 잘하고 있는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잘 치를 거라고, 꼭 원하는 성적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시험 한 번에, 등급 하나에 아이들은 ‘실패’를 생각해야 할 만큼 지금의 입시제도는 실수에 허용적이지 않다. 대학에서는 고르게 성적(물론 좋은 성적)을 유지하는 아이들을 원하고, 성적 변화가 있는 아이라면 당연히 상향 곡선을 그리는 아이를 원한다. 등급이 좀 떨어지더라도 허용하는 경우는 ‘교과 세부능력 발달사항’이라고 해서 수업 시간에 학생 활동을 교사가 구체적으로 기록한 자료가 풍성한 경우에 한했다. 이 말은 결국, 아이들은 실수하거나 넘어질 틈 없이 계속해서 무언가를 해내야 하고, 그것을 ‘자료(성적 등급이든, 교사의 기록이든)’로 증명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감히, 불안하다 말하는 아이에게 ‘시험 한 번이, 등급 하나가 실패는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불안해하지 않아도 잘할 거라고, 원하는 성적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말하는 건 또 어떤가. 그 아이가 1등급을 무사히 받는다면, 같이 경쟁하던 어떤 아이는 2등급이 되었다는 말이다. 2등급이 된 아이가 덜 치열했을까. 덜 열심히 했을까. 절대, 결코 아닐 것이다. 그러니 함부로 ‘네가 원하는 성적을 꼭 받을 거’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런 말을 했다고 해도 아이에게는 별다른 위안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학교에서 아이들이 ‘실패해도 일어서는 법’, ‘타인과 협력하는 법’, ‘인생의 중요한 가치를 찾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가족이 아닌 누군가를 환대하고 누군가에게 환대받는 경험과 전에 모르던 것을 알게 되면서 느끼는 희열 같은 감정을 경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학교 현장은 그렇지 않다. 더 부끄러운 것은 내 수업도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방과 후 수업으로 모의고사 풀이반을 열어달라고 하면 열어줄 수밖에 없고, 시험문제를 내면서도 아이들의 등급을 나누어야 하니 적당히 어려운 문제를 섞어낼 수밖에 없다. ‘~수밖에 없다’는 변명 뒤에 숨어 신념과 현실의 간극을 매일 널뛰는 기분이다. 말할 수 없이, 위태롭다.      


학생이 자발적으로 공부를 해나가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학생의 개인적인 성장이지 타인과의 비교가 아닙니다. 하지만 한국 교육의 상대평가라는 평가 시스템은 철저한 비교를 통해 학생들을 일등부터 꼴등까지 줄을 세우고 점수를 매깁니다. 이 점은 대학이라고 해서 다를 게 없고 대부분의 기업체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러한 경쟁 구도는 스스로 동기를 찾고 발전시켜 공부하기보다는 다른 학생들과의 경쟁에 집중하게 만듭니다.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성장을 고려하지 않은 결과로 학생들을 쉽게 좌절하게 만들고 의욕을 잃게 합니다. 성찰 없는 성장을 강요하는 한국의 대학과 초중고등학교의 평가방식은 교육적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한동일, '라틴어 수업')


교육적이지 않은 것을 교육하는 곳에서,

교육적이지 않은 것을 따르는 내가(심지어 내 신념은 그게 아니라고 하면서), 가끔은 못 견디게 모순적으로 느껴진다.  


학교에 오래 남을 수 있을까.

요즘 들어 자주 생각한다. 나의 신념이 철없고 시대착오적인 게 아닐까 느끼는 날이 많아질수록, 신념과 현실의 모순을 처절하게 체감할수록,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무기력에 사로잡힐수록. 생각이 깊어진다.


학교에 오래 남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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