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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Jun 26. 2022

샘, 제 얘기 좀 들어주세요.

해마다 유난히 따르는 아이들이 있다. 특히 여학생들 중에는 나를 마치 사촌언니(?) 혹은 이모(?)처럼 느끼는 아이들이 꼭 있는데, 올해도 몇이 그렇다.


올해의 아이들은 마음으로 따르는 걸 넘어 몸으로도 엄청 엉긴다. 학생이 선생에게 몸으로 엉긴다니 듣기에 따라서 고개가 갸우뚱하실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복도에서 만나면 저 멀리서도 “선생님~~~~~”하고 뛰어와 팔짱을 끼거나 손을 잡기도 하고, 어린아이처럼 안아달라며 두 팔을 벌리기도 한다. 나랑 저희가 보면  얼마나 오래 봤다고 그러는지. 생각하면 참  희한하다. 그래도 마음이 헛헛해 그러나 보다, 뭔가 채워지지 못한 마음이 있나 보다 여기며 손도 꼭 잡아주고 안아주기도 한다. 그러면 나보다 키도 훨씬 아이들이 수줍게 웃으며 품에 쏙 안긴다.      




지난 금요일, 기말고사 직전이라 아이들이 조용히 자습을 하고 있었다. 복도에서 개별적인 질문을 받아주고 있었는데 평소 품에 안기던 아이 하나가 갑자기 낮은 목소리로 “샘, 제 얘기 좀 들어주세요.”라고 말했다. 달아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쌤, 우리 반에 있는 게 너무 힘들어요.”

“왜? 반에 무슨 일이 생겼어?”

“반에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구요. 우리 반에서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 무리가 있는 거 아시죠? 거기에 일이 좀 있어요.”

“알지. 근데 무슨 일인데?”

“있잖아요, 쌤. 00이가 갑자기 저희를 피해요. 그래서 저랑 △△가 무슨 일 있냐고, 우리한테 뭐 화나는 일 있냐고 물어봤는데 그냥 배가 좀 아파서 그렇대요. 그러고는 다른 애들하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잘 지내요.”

“흠... 무슨 일이 없는 것 같지는 않네.. 너  무지 힘들겠다..”

“그니까요! 너무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아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학기말 고사를 5일 앞둔 날, 시험 전 마지막 수업 시간이었다. 욕심 같아서는 시험 범위에 해당하는 내용을 질문해줬으면 싶었다. ‘제발 내가 낸 문제를 콕 짚어서 물어주렴.’ 그런 마음! 역시 그건 내 마음일 뿐, 아이는 전혀 다른 문제를 물어왔다. 마스크 위로 빼꼼 나온 눈이 꽤 붉어지고 있었다.      


“음... 샘도 무슨 말을 어떻게 해줘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그냥 좀 두면 어때?”

“너무 답답한데요..?”

“근데 지금 너희들이 물어도 배가 아파서 그렇다는 말 외에는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며. 너희가 계속 묻거나 다른 방법으로 물었을 때, 다른 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아니요... 아닐 것 같아요.”

“우리 00이한테 시간을 좀 주자. ‘그냥, 지금 00이의 마음이 그런가 보다. 뭔가 우리한테 말 못 할 일이나 서운한 점이 있나 보다’ 여기면서 좀 기다려주는 거지.”

“그럴까요..?”

“지금 너희가 마음을 쏟는 것만큼 큰일이 아닐 수 있어. 조금 더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때가 있을 수도 있고. 단, 00한테 서운한 마음이 든다고 해도 절대 뒷말은 하지 말고. 그냥 묵묵히 기다려보는 거지. 00이도 뭔가를 말하기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 네, 샘. 그래 볼게요.”


붉게 차오르던 아이의 눈이 조금은 고요해지는 게 보였다. 아마도 아이는 이 일과 관련이 없는 누군가에게 이 일을 털어놓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답을 구한다기보다는, 자기가 지금 이렇게 답답한 상황이라고, 그래서 공부도 뭐도 아무것도 집중이 안 된다고 하소연하고 싶었던 걸지도.      


그 상대가 나였다니, 고마운 일이었다. 저희들끼리 풀지 못한 숙제를 의논할 만한 ‘어른’으로 느껴졌다는 게 더없이 기뻤다. 의논이라기엔 별다른 해결책을 주지 못했지만, 돌아서는 아이의 눈이 조금은 덜 슬퍼 보여서 그걸로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사춘기를 갓 지났거나, 여전히 사춘기를 지나는 중인 아이들에게 ‘친구’만큼 중요한 사회적 관계는 없다. 친구의 한 마디에 웃고 우는 때다 보니 교우관계에 감정 소비가 무척 . 나도 꼭 그런 시간을 거쳐왔기에 아이들의 이야기가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시험이 코앞인데, 쓸데없는데 마음 쓰지 말고 공부나 해!”라고 말하지 않는 어른일 수 있어서, "너 힘들겠다..."라고 공감해주는 어른일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그나저나 앞으로 더 세게 안겨올 것 같은데. 흠.


어쩔 수 없다. 더 세게 안아줘야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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