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든(헨리 데이빗 소로우)

by 진아


우리는 너무나도 철저하게 현재의 생활을 신봉하고 살면서 변화의 가능성을 부인하고 있다. “이 길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어.” 하고 우리는 말한다. 그러나 원의 중심에서 몇 개라도 다른 반경을 가진 원들을 그릴 수 있듯이 길은 얼마든지 있다. 생각해보면 모든 변화는 기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기적은 시시각각으로 일어나고 있다.(30쪽)


‘길은 얼마든지 있다.’는 문장, 대단히 특별한 문장은 아니다. 이미 흔하게 쓰는 표현이니까. 그러나 이 문장을 월든에서 만났을 때, 나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길은 얼마든지 있지, 중심에서 반경이 다른 원을 다시 그릴 수 있지. 모든 변화는 기적이지. 기적은 시시각각 일어나고 있지.’


한동안 소로우의 문장이 머릿속을 쿵쿵 울리며 걸어 다녔다. 아마도 지금의 내가 반경이 다른 원을 그린 후, 시시각각 일어나는 변화와 마주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그린 새로운 반경의 원은, 다름 아닌 ‘글쓰기’이다.




글쓰기를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 삶의 큰 테두리가 ‘다 결정되었다’라고 생각했다.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나이에 직업을 가졌고, 결혼을 해야 한다는 나이에 결혼을 했다. 너무 늦지 않게 아이를 낳아야 할 것 같아 결혼 후 채 1년이 되기 전에 아이를 가졌고, 아이가 둘은 있어야 한다는 어른들의 말씀을 따라 둘을 낳았다. 감사히도 두 아이의 성별은 아들 하나 딸 하나였다. 내 삶의 반경은 딱 그 정도, 그만큼이면 충분했다. 더 이상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라 생각했다. 이제는 내가 그린 원의 반경 안에서 안온한 삶을 이어가는 것만이 내 몫이라 확신했다.


우연한 계기에 글쓰기를 시작했고, 매일 쓰는 사람이 되었다. 나의 글쓰기에는 목적이 없었다. 글로 밥을 먹고살겠다는 결심도, 글로 명성을 얻겠다는 다짐도, 글로 부를 누리겠다는 욕심도 없었다. 그냥 썼다. 쓰지 않고는 버틸 도리가 없어서, 그러다 보니 쓰기에 중독되어서 쓰고 또 썼다. 그때의 글쓰기는 나에게 오직 즐거움이었다. 시간이 흘러 어느 순간, 글쓰기가 고통스러운 순간이 왔다. 그럼에도 멈추지 못했던 것은 글쓰기를 통해 삶이 깊어지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어느덧 즐거움과 상관없이 계속 쓰는 사람이 되었다.


글을 쓰는 동안 나는 잠시 다른 차원에 머무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저녁을 먹었던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 대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뿐인데. 마치 아주 먼 곳, 아득한 시간 속으로, 들어온 것 같다. 엄마였던 시간, 아내였던 시간, 직장인이었던 시간, 집이라는 공간, 거실이라는 공간, 밥 먹는 곳(식탁)이라는 공간에 대한 인식은 송두리째 사라지고 오직 ‘나’와 대면하는 ‘나’만 남은 시공간에 안착한 기분이다.




소로우의 월든은 사람을 떠난 곳에 존재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속세’를 떠난 곳이었다. 소로우는 많은 것을 누리고도 더 누리고 싶어 하는 마음을 당연하게 여기는 인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최대한 소박하고 자연스럽게 살 수 있는 곳, 월든을 찾았다. 그곳에서 소로우는 작은 집을 짓고, 작은 땅을 경작하며, 꿈꾸었던 대로 소박하게 살았다. 욕심내지 않고 아쉬워하지 않았다. 있으면 있는 만큼, 없으면 없는 대로 만족하며 사는 삶을 몸소 실천했다. 덕분에 소로우의 ‘월든’은 자연주의, 미니멀리즘의 고전처럼 읽힌다. 하지만 내게 ‘월든’은 자연주의와 미니멀리즘으로 남지 않았다.


나에게 월든을 기억할 키워드는 ‘자유’다.


‘나’ 한 몸 편히 쉴 공간과, ‘나’ 한 사람 먹고 마실 정도의 음식, ‘내’ 몸 하나 따듯하고 시원하게 보호할 옷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 그 대신 영감을 주는 소리, 모습, 냄새, 촉감이 가득하고 온전히 그것들에 몰입할 수 있는 정신적 여유가 있는 삶. 소로우에게 그게 가능했던 곳은 ‘월든’이었다. 그곳에서 소로우는 겨울 호수의 얼음에, 자연 속 동식물에, 간간이 자신을 방문하는 방문객들에게, 자신의 철학을 실천하는 태도에 집중했다. 자유롭게, 오직 자신의 의지로. 모두가 옳다고 생각하는 삶을 온몸으로 부정하면서.


사람들이 찬양하고 성공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삶은 단지 한 종류의 삶에 지나지 않는다. 왜 우리는 다른 여러 종류의 삶을 희생하면서까지 한 가지 삶을 과대평가하는 것일까? (42쪽)


사람들이 찬양하고 성공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단 한 가지’의 삶 속에 내 삶을 욱여넣으려 애쓰던 시간이 있었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직업을 갖고 싶었고, 때 맞춰 결혼을 하고 싶었다. 아들딸 하나씩 낳아 빈틈없이 딱 맞는 네모 모양 가정을 꿈꿨다. 노력도 했지만 엄청난 운도 따라야 했던 삶이었다. 막상 꿈이 현실이 되었음에도 ‘행복하지 않다’ 느꼈을 때, 당황을 넘어 황망함을 느꼈다. 내가 놓친 건 무엇이었을까.


소로우가 ‘보다 높은 법칙들’을 위해 월든을 찾은 것처럼, 나는 내가 놓쳤는지도 모르고 살았던 ‘무언가’를 찾기 위해 글쓰기를 시작했다. 그렇게 지금 여기까지 왔다. 소로우가 월든에서 자유를 느꼈던 것처럼, 적어도 글을 쓰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나는 온전히 ‘자유’롭다.




거실 창밖으로 보이는 (너무 밝은 게 조금 흠이긴 하지만) 별처럼 빛을 내는 가로등 불빛과 사라졌다 나타나고 나타났다 사라지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 부드럽게 울리는 블루투스 스피커 속 이름 모를 연주곡과 작은 어항 속 여과기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 가끔은 따듯한 차 한 모금, 자주는 달게 쓴 맥주 한 모금. 방금 빨아 널어 둔 빨래에서 풍기는 섬유유연제 향기. 추운 날에는 보드라운 무릎 담요, 더운 날에는 부드럽게 틀어둔 선풍기 바람. 그리고 창밖 어둠을 거울삼아 비치는 거실의 모습과 식탁에 앉아 글을 쓰는 나의 실루엣.


시각부터 청각, 미각, 후각, 촉각을 고루 자극하는 나만의 월든에서 오늘도 나는 ‘무언가’를 찾는 중이다. 온전한 자유 속에서, 매일 새로이 나만의 원을 그려가며.

당신 자신을 탐험하라. (중략) 지금 당장 가장 먼 서쪽 길을 향해 떠나라. 그 길은 미시시피 강이나 태평양 해안에서 멈추지 않으며, 케케묵은 중국이나 일본에 가는 것도 아니며, 당신의 세계와 직접적인 접선을 이루며 당신을 그리로 인도해줄 것이다. 여름에도 겨울에도, 낮에도 밤에도, 해가 지고 달이 지고 마침내 지구마저 지더라도 말이다. (4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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