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일을 하더라도, 매일 행복하진 않아.

by 진아

“아, 내일 월요일이다. 내일은 또 얼마나 바쁠까?”


저녁밥을 먹으며, 무심결에 툭 나온 말이었다. 학기말이라 정말 너무너무 바쁜 날들이라 월요일이 오는 게 두려웠다. 의식하지 않는 순간에 저런 말이 튀어나올 만큼.


“엄마, 학교 가는 거 힘들어?”

“아, 엄마가 요즘 학교가 너무 바빠서 그냥 좀 걱정이 됐어.”

“학교 가기 싫어? 선생님 하기 싫어?”

별생각 없이 뱉은 말이었는데,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야. 엄마는 학교 가는 거 좋아. 선생님이라는 일도 참 좋고.”

“그런데 월요일이라고 싫어했잖아.”

“아, 그 두 마음은 다른 거야. 엄마는 학교에서 누나 형아들 만나는 것도 좋고 엄마 일도 정말 사랑해. 하지만 일이 너무 많아서 그 일을 시간 안에 다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조금 걱정이 되는 거지.”

“다른 거야?”

“달라.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면 가끔 하고 싶지 않은 일도 해야 할 때가 있어.”


아이가 나의 말을 얼마나 이해했는지 알 수 없지만, 아이는 진지한 표정을 거두고 식탁에서 내려갔다. 아이 앞에서는 찬물도 함부로 마실 수 없다더니, 아이가 자랄수록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더 조심스러워진다.


아이가 잠든 밤, 아이와의 대화를 복기하다 보니 너무 어려운 말을 했다 싶다.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면, 하고 싶지 않은 일도 해야 할 때가 있다’라는 것을 여섯 살짜리가 어떻게 이해했을까.


문득, 지난 목요일에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십 대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십 대들이 얼마나 낭만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지 느낄 때가 많다. 여기서 '낭만적'의 뜻은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것'이다. 이십 대가 되면, 즉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더 이상 하고 싶은 일은 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생각, 아니 확신. 지극히 낭만적인(비현실적이고 감상적인) 생각이 아닌가.


“너 이번에 국어 점수가 왜 이렇게 떨어졌어? 샘 깜짝 놀랐어.”

“아, 샘 저 메이크업하려고요.”

“진로가 바뀐 거야?”

“네, 좀 어이없는 이유로 시작하긴 했는데요, 어쨌든 메이크업하려고 학원 등록했는데 하필 기말고사 기간이랑 필기시험이랑 겹쳐서 기말고사 깔끔하게 포기하고 필기 준비했어요.”


진로도 제법 분명했고 국어 성적도 꽤 나오던 아이였다. 그런데 이번 시험 성적이 갑자기 너무 떨어졌길래 아이를 불러다 물어봤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아이가 말한 ‘어이없는 이유’는 그렇게 친하지 않은 어떤 언니가 ‘너한테 메이크업이 잘 어울릴 것 같다’라고 말을 했고 그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진짜 그런 것 같아서’였다. 그날로 부모님을 설득했고, 학원을 등록했고, 필기시험 이후에 실기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라고.

아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필요하지도 않고 하고 싶지도 않은 학교 공부는 접었다고 했다.(정말 좋아하는 일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의문이다...) 사실 그 단호함과 용기(적어도 나에게는 용기로 보였다)에 적잖이 놀랐다. 그토록 짧은 고민으로 내린 판단에 단번에 모든 것을 거는 아이의 결심에,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지 몰라 순간 우두망찰 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을 깔끔하게 접어버리는 것. 십 대이기에 가능한 일인 걸까.




교사라는 직업이 오랜 꿈은 아니었다. 하지만 교사가 된 이후에 한 번도 이 직업을 선택한 것을 후회한 적이 없을 만큼 이 일을 사랑하고 있다. 아이들을 만나고 그들의 삶에 영향력을 끼치는 일도, 내가 배운 것을 더 의미 있는 방향으로 설계해서 가르치는 일도, 감사하게도 나의 성정과 잘 맞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교사로서 해야 하는 많은 일들이 모두 즐거운 것은 아니다.


과중한 업무도, 매년 다른 아이들이나 학부모를 대해야 하는 일도, 나와 교직관이 전혀 다른 동료 교사와 발을 맞추어 일을 추진해야 하는 것도, 매년 달라지는 입시 제도와 수시로 바뀌는 교육과정에 유연하게 적응해야 하는 일도, 일일이 설명할 수도 없는 자잘한 잡무도, 대체로 쉽지 않다. 정말 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울며 겨자 먹기로 해야 하는 때도 많고, 도대체 이 일이 ‘교사’라는 직업적 본분과 무슨 상관이 있는 일인가 하는 근원적인 의문을 품을 때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만 해야 하는 일이기에 열심히 한다. 그래야만 좋아하는 이 일을 오래 지켜낼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열아홉, 입시생이던 내가 국문과에 진학하기 위해 가장 열심히 공부했던 과목은 당시 가장 성적이 낮았던 영어였다. 영어가 싫어서 국어 전공을 꿈꿨는데, 정작 국어를 전공하는 데에 가장 절실하게 필요했던 과목은 영어였다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닌가. 어쨌든 영어 공부를 정말로 열심히 했고, 그렇게 내 영어 공부는 열아홉 수능 시험 준비에서 끝이 났다. 그래도 그때 그렇게 열심히 외웠던 단어 몇 개가 남아 짧은 영어로 유럽 여행도 했다.

학교에서 배우는 많은 과목들이 ‘필요’와 ‘쓸모’의 관점에서 해석되는 현실이 씁쓸하다. 이제 와 그때를 떠올려 보면, 그때 내가 배운 것은 ‘내가 하고 싶은 일(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하고 싶지 않은 일도 해야 할 때가 있다는 것, 어쩌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더 열심히 해야 하는 순간도 있다는 것’이 아니었을까. 물론 당시에는 몰랐지만. 그때 몸으로 익히고 배운 그 사실이 이후에 어떤 일을 할 때에,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좀 덜 괴롭게 해낼 수 있는 에너지가 되지 않았나 싶다.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면 가끔 하고 싶지 않은 일도 해야 할 때가 있어.”


아이에게 한 말이지만, 곱씹어 보니 내 마음을 다잡는 말이기도 하다. 좋아하는 일을 지켜내기 위해서, 오래 하기 위해서 하고 싶지 않은 일도 기껍게 해야겠다. 그 마음으로 내일도 기쁘게 출근해야지. 그리고 메이크업을 하기 위해서 학교 공부를 단번에 모두 포기해버렸다는 아이와 내일 다시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다.


“좋아하는 일을 하더라도 매일 행복하지는 않아.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 할 때도 많을 거야.”


열일곱, 이 말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기에는 여전히 너무 어린 나이겠지만, 그래도 말해줘야지. 네가 좋아하는 일을 더 잘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참고 해낼 수 있는 힘도 필요하다고. 꼭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말이 아니라고. 네가 메이크업을 하게 되더라도 늘 즐거운 순간만 있는 것은 아닐 테니, 하고 싶지 않은 일도 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을 길렀으면 좋겠다고.


다정함을 가득 담아 말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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