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와서. 다정하게 마무리하는 하루.

by 진아

12월도 2주가량이 남았다. 학교는 그야말로 전쟁통을 방불케 한다. 학기말 성적 처리와 생활기록부 작성, 학년말 진급 사정회(학년 진급 대상자가 몇 명인지, 유급이나 유예 학생이 있지는 않은지 등을 평가하는 자리), 이듬해에 학교를 이동하는 선생님들의 내신서 작성, 당해연도 성과급 책정을 위한 다면 평가, 내년도 업무 분장을 위한 업무 분장 희망원 제출, 학년 말까지 치르지 못한 각종 부서의 행사, 학교 축제 준비, 부서별 결산 보고 및 내년도 예산안 작성…….


대충 생각나는 것만 썼는데도 이 정도 일이 동시에 돌아가고 있다. 아마 이것도 현시점 학교 일의 60프로가 안 되는 것일 테다. 각 부서와 각 반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을 다 쓰자면, A4 반 페이지는 거뜬히 쓸 수 있지 않을까.


일이 많다 보니 실수도 사고도 많다. 웬만큼 꼼꼼하신 선생님들도 여기저기서 실수를 하신다. 한 군데 실수가 발생하면 연쇄적인 문제가 생기고 그것을 수습하는 것도 만만찮은 일이다. (안 해도 되는 일이 더 생기는 꼴..) 그래서 학년 말의 학교는, 그중에서도 교무실은 모두가 조금 차갑고 뾰족하다.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일한다, 수업 시간이 쉬는 시간이다는 말은 교사들 사이에서 너무나 익숙한 농담이다. 차라리 수업에 들어가면 아이들과 수다도 떨고, 웃기도 하지만 교무실에 있을 때는 모두 컴퓨터에 빨려 들어갈 듯한 자세로 일‘만’ 한다.


나도 다르지 않아서 이제껏 벌려놓았던 각종 사업들의 성과를 정리하고, 여러 보고서를 묶어 결재를 올리고, 틈틈이 1년 동안 가르친 아이들의 생활기록부를 작성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는 날들이다. 근무 시간 동안 화장실 한 번을 못 가고 종일 종종거리며 일을 처리하는 데도 시간 안에 해내지 못해 집까지 싸 들고 오기 일쑤다.(지금 시간, 00시 20분. 지금까지 학교 일을 했다. 헛헛... 헛웃음이 나는군...) 덕분에 학교에서는 웃을 일보다는 찌푸릴 일이 더 많던 요즘.

눈이 왔다. 몇 년에 한 번씩 오는 눈이.




아침에 눈이 와서 쌓이기 시작한 것을 확인하고 출근길이 걱정되었지만, 어째 저째 무사히 출근을 했다. 차를 몰고 정문에 들어서는데, 운동장의 모습이 낯설었다. 하얗게 변한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운동장 한 편에는 소담한 눈사람도 있었다. 익숙한 얼굴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3학년들이구나 싶었다. 늘 조용하던 운동장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퍼져나가고 있었고, 잎이 다 떨어져 스산하던 겨울나무에는 하얀 꽃들이 만개해 있었다. 출근길 내내 오늘 해야 할 일들의 목록을 생각하며 시간을 어떻게 쪼개 써야 할까 고민했는데,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모든 고민이 일시정지되었다.


지난 3년, 코로나를 겪으며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다운 추억 하나 갖지 못한 아이들이었다. 지금 고3들이 고1 때 코로나가 터졌으니, 고등학교 생활의 절반 가까운 날들을 온라인 수업으로 대체했고 고등학교 생활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수학여행은 꿈도 못 꿨던 아이들이었다. 졸업여행도, 소풍도 모두 못 간 것은 물론이고 삼삼오오 모여 급식을 먹는 소박한 즐거움도 누리지 못했던 아이들. 어쩌면 마스크를 벗고 서로의 얼굴을 확인한 친구보다 그렇지 못한 친구들이 더 많을지도 모르는 아이들. 슬프다고 말하기엔 씁쓸하고, 씁쓸하다고 말하기엔 서글픈 아이들이었다.

그래도, 수능이 끝났다고 이제 곧 졸업이라고 저렇게 신이 나서 눈싸움을 하고 있는 걸 보니 괜히 좋았다. 누구 하나 아는 아이들은 아니지만, 아이들이 웃으니 덩달아 웃음이 났다.




“샘! 우리도 밖에 나가서 눈싸움해요!”


1학년 수업에 들어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아이들이 밖에 나가서 놀자고 했다. 아, 담임 반이기만 했어도 당장 데리고 나갔을 텐데, 그럴 수가 없어서 미안했다. 방학이 코앞인데 수업하지 말고 이야기나 하면 안 되냐고 묻는 아이들에게 차마 안된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 오늘은 눈도 오니까.’


아이들의 이야기 주제는 참으로 들쑥날쑥해서 갈피를 잡을 수 없었지만, 덕분에 아이들의 고민, 연애, 진로, 성적 이야기까지 두루 듣고 나눌 수 있었다. 담임도 아닌 나에게 저희들의 마음을 드러내 보여주는 아이들이 그저 고마워서 그냥 듣고 또 들었다.


마침종이 울리고 교무실로 돌아왔다. 그 사이 또 다른 업무 전달 메시지가 몇 개나 와있었고, 쉬는 시간 그 짧은 틈에 내가 담당하는 업무 관련 질문 전화도 걸려왔으며, 처리해야 하는 서류는 며칠째 그대로 책상에 쌓여 있었다. 그런데도 희한하게 오늘따라 뾰족한 모서리가 좀 무뎌진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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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목소리 때문인가, 웃음소리 때문인가, 하얀 눈 때문인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오늘은 종일 바빴어도 덜 예민한 날이었다.


어쨌든 간에, 오늘의 학교도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아무리 바빠도 시간은 흐르고 이번 학년도도 끝이 날 것이다. 생각해보니 아이들과의 마지막이 가까워온다. 내년에는 이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을지 없을지 알 도리가 없으니, 어쩌면 진짜로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이랑 기념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야 할까 보다. 다정하고 다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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