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거실창으로는 해지는 풍경이 보인다. 너무나 선명하고, 너무나 분명하게. 이 집에 이사 온 후로 몇 번의 일몰을 보았을까. 셀 수 없을 것이다. 첫째 아이를 안아 재우며, 둘째 아이에게 젖을 먹이며, 첫째와 둘째를 양팔에 끼고 서서, 두 아이의 등 너머로. 어떤 날은 울면서, 어떤 날은 웃으면서, 어떤 날은 아쉬워하면서, 어떤 날은 후련해하면서. 참 많은 해를 보냈다. 일몰 시간의 붉은 보랏빛 노을을 보았다.
올해의 마지막 해가 졌다. 아이들과 놀고 있다가 문득 창밖을 보았더니, 올해의 마지막 해가 반이나 넘어가 있었다.
“얘들아! 올해 마지막 해 진다!”
추위를 무릅쓰고 거실 통창을 활짝 열어, 지는 해의 머리자락을 겨우 카메라에 담았다. 아이들은 매일 지는 해에 엄마는 왜 호들갑인 걸까, 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래, 아이들에게는 그저 그런. 어제도 보고 그제도 봤던 해와 다름없었을 것이다. 나에게는 너무나 특별한 해였지만.
일몰을 끝으로 올해의 마지막 해가 넘어가고, 2022년도 저물었다. 태양을 의미하는 ‘해’와 일 년을 의미하는 ‘해’의 발음은 어째서 같은지, 꼭 말장난처럼 오늘의 해가 지자, 올해도 졌다.
2022년은 여러모로 의미가 깊은 해였다. 5년이라는 긴 시간 끝에 학교로 복직했고, 별 탈 없이 학년도를 마무리했다. 여섯 살이 된 첫째는 원하던 유치원에 입학하여 잘 적응해 주었고, 어린이집 적응을 어려워하던 둘째가 즐겁게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했다. 일 년 동안 선량작가님, 읽는인간작가님과 함께 준비한 ‘쓰다 보면 보이는 것들’이 마음연결 출판사를 통해 무사히 출간되었고, 얼마 전 2쇄를 찍었다는 꿈같은 소식을 들었다. ‘쓰다 보면 보이는 것들’의 투고 과정에서 다른 출판사와 새로운 인연이 되어 세 번째 책을 계약했고, 틈틈이 쓴 초고는 이제 퇴고 단계에 접어들었다.
한 해에 이렇게 많은 일이 있었다는 것이 믿기 어려울 만큼,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쉬운 일은 하나도 없었지만, 포기한 일도 없었다. 꾸역꾸역 해야만 하는 일도 없지 않았으나, 어떤 일 하나도 허투루 하지는 않았다. 최선이라고 생각할 만큼의 에너지를 여기저기 꼭 맞게 썼고, 덕분에 지나간 시간에 미련이나 후회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지는 해는 아쉽기만 한지. 잡아둘 수 있다면 조금만 더 잡아두고 싶다는, 헛된 꿈을 꿀 만큼 조금만 조금만…… 그랬다. 단순히 나이를 먹어서일까. 새해를 맞이하는 보신각의 종소리에는 더 이상 흥분하지 않는데, 12월 31일 마지막 지는 해에는 이토록 가슴이 저릿하다니. 그래도 지는 해를 잡을 도리는 없다. 오는 해를 막을 도리가 없듯이. 유일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지는 해를 잘 보내주고, 오는 해를 잘 맞아주는 일뿐이다.
오늘 ‘내년도 목표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받았다.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답이 나왔다.
‘매일 충실하게 사는 것’
거창한 목표 대신, 매일 충실히 살아가고 싶다. ‘열심히’보다 ‘충실히’를 쓰는 이유는, 충실하다는 단어의 뜻이 ‘알차고 단단하다’이기 때문이다. 매일을 단단하게 살고 싶다. 잎과 가지는 흔들리더라도 줄기와 뿌리를 단단히 세운 아름드리처럼, 단단한 매일을.
새해와 함께 올 매일이 늘 행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슬프고 힘겨운 날도 반드시 함께 올 것을 안다. 하지만 그 슬픔과 힘겨움이 꼭 불행한 것은 아닐 것이다. 매일을 충실히 살아가다 보면, 슬픔 속에 숨은 행복의 씨앗을 발견할 줄 아는 눈도 생길 것이고 잠시 멈추어 슬픔의 폭풍을 견딜 힘도 생길 것이다. 그러다 보면 또, 힘겨운 순간보다 행복한 순간이 더 많아질 것이고, 행복한 순간을 알아차리는 감각도 보다 더 예민해질 것이다.
우리말의 인사말은 만날 때도 ‘안녕’, 헤어질 때도 ‘안녕’이다. 헤어질 때에도 상대의 ‘안녕’을 기원하고, 만날 때에도 서로의 ‘안녕’함을 나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