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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Jan 03. 2023

어떤 인연

인연 : 사람들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


인연을 이렇게 단순하게 정의해도 되는 걸까. 인연이라는 단어 안에는 얼마나 엄청난 시간과 공간, 감각이 켜켜이 쌓여있는데!


언젠가부터 인연을 만드는 것보다 지키는 일이 더 소중해졌다. 아마도 삼십 대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새로운 인연보다 이미 맺어진 인연에 마음을 쏟았다. 스치는 인연보다 묵은 인연에 마음을 기울였다.


묵은 인연이라고 해도 다 같진 않았다. 애써 마음을 기울여도 어떤 인연은 자주 만나지 않으면 옅어졌고, 어떤 인연은 오래 만나지 않아도 깊어졌다. 어떤 인연은 연이 깊어질수록 피로했고, 어떤 인연은 연이 깊어질수록 포근했다. 어떤 인연은 만날 때마다 과거만 곱씹게 되었지만, 어떤 인연은 과거의 기억을 딛고 현재를 나누며 미래로 나아가게 했다.


시간이 갈수록 마음의 추가 기우는 쪽은  분명해졌다. 깊어지고, 포근해지며, 현재를 나누고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인연. 그런 인연 몇 개만으로도, 지난한 세월은 견딜 만한 것이 되었다. 나란 인간이 꽤 괜찮은 사람처럼, 내 생이 조금은 그럴싸한 생처럼 여겨졌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16년 전, 그러니까 2007년이었다. 우린 교육대학원 동기였지만 그녀는 나보다 5살이 많았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대학원에 진학한 학생이었고, 그녀는 대학 졸업 후 사회생활을 하던 중 대학원에 입학한 사회인이었다.


스물아홉이던 그녀는 스물넷이던 나를 보고 '참 푸릇푸릇 예쁘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나는 그녀를 보고 '참 어른스럽고 예쁘다'라고 생각했다. 그녀와 나는 서로가 예뻤고,  서로가 좋았다.


대학원에 다니던 2년 6개월 동안 매주 번씩 얼굴을 보았다. 내가 그녀에게 먼저 다가갔는지 그녀가 먼저 다가왔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끌렸다. 대학원에서 갔던 답사에서 버스 옆자리에 앉으며 우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그녀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던 연애를 진행 중이던 내게는 정말 큰 어른처럼 보였다. 연애 고민을 털어놓았고, 그녀는 어른답게 들어주었다.(섣불리 조언하지 않고 그저 들어주던 모습에서 나는 그녀가 어른이라고 확신했다.)


그녀가 첫아이를 가지고 출산을 하기까지, 나는 임용 시험을 준비했고 우리는 서로의 삶에 열중했다. 대학원도 수료했기에 시간을 내어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내가 임용에 합격하고, 나도 그녀도 함께 있던 도시를 떠나 각자 새로운 터전을 닦았다. 그 사이 그녀는 둘째 아이를 낳았고, 나는 결혼 후 첫째와 둘째를 2년 터울로 낳고 길렀다.


우리가 만나지 못한 세월이 11년이었다. 11년 동안 몇 년간은 안부조차 묻지 않았다. 서로의 생활이 바빴다. 문득문득 생각이 났어도 연락을 해야겠다는 생각에까지 미치지 못했다. 망설였던 건 아니다. 그저 어련히 잘 지내고 있겠거니 했다. 주기적으로 바뀌는 카톡의 메인 사진을 보며, '여전히 언니는 참 예쁘게 잘 살고 있구나' 안도했다.


올해 여름 어느 날, 문득 본 그녀의 카톡 프로필 사진에서 '제주살이'라는 문구를 보았다. 경기도에 있어야 할 언니가 제주에 살고 있다니? 정말 오랜만에(오랜만이라는 말로도 품기 어려운 세월이 흐른 차였지만) 언니에게 카톡을 보냈다. 이내 답이 왔다.


"진아야. 나는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어.

저녁시간인데.. 혹시 통화가능한가?"


여전히 그녀는 상대의 사정을 먼저 배려하는, 멋진 어른이었다. 퇴근길 내내 통화를 했다. 오랜 안부를 물었고, 닿지 못했던 동안의 아픔과 슬픔을 나누었다. 그날 알았다.


어떤 인연은 10년의 세월이 하루의 시간보다 무색하다는 것을.





11년 만에 그녀와 만났다. 우리가 인연을 맺었던 부산도, 나의 터전인 대구도, 그녀의 터전인 경기도도 아닌. 제주에서. 제주의 바다에서.


함께 책방에 가서 책을 고르고, 커피를 마시며 드라이브를 했다. 바다를 바라보았고, 제주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했다. 추억을 나누었고 오늘을 공감했다.


그녀와 세 시간 남짓. 우리는 오래 묵은 인연의 주춧돌 위로 세월의 기둥을 세웠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놓지 않아야 할 가치에 공감하면서 단단한 지붕도 얹었다. 그리하여 비바람에도 무너지지 않을 인연의 집을 지었다.


그녀와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는 알 수 없다. 우리는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만남을 기약하지 않았다. 필요 없는 약속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만나지 못한다고 해서 좀먹을 인연이 아님을, 비가 새고 곰팡이 필 인연이 아님을, 알고 있으며 믿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는 이렇게 인사했다.


'또다시 서로의 삶을 잘 살아가다,  어느 날 문득 기적처럼 다시 만나요.'


기적을 기다리는 마음이면 웬만한 버거움도 견딜 만할 것이다. 새해의 출발에 기적을 선물 받았으니, 올해는 꽤 살만 한 해가 되겠다. 벌써부터 기운이 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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