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뉴스에 오르내리는 학교 관련 기사들을 보면, 교사로서 참담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다. 수업을 하고 있는 교사 옆에 누워 휴대전화를 하고 있는 학생들의 영상이나, 학부모와 학생들의 폭언, 폭행에 시달리는 교사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는 통계 자료 같은 것을 접할 때마다 '과연 내가 이 일을 오래도록 할 수 있을까' 의문마저 든다.
운이 좋게도 지금껏 아이들에게 크게 상처받는 일 없이 교직 생활을 해왔다.(다행히 학부모들에게도!) 대체로 아이들은 나를 잘 따라주었고, 나는 아이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다. 올해로 교직 8년 차, 어째서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교사가 아무리 잘하려고 해도 결이 맞지 않는 아이들이나 도저히 대화가 통하지 않는 아이들을 만나면 답이 없다. 한 사람의 애씀으로는 관계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교사가 노력한다면 그만큼 아이들도 마음을 열어야 하는데, 아이들이 마음을 닫아 버리면 다른 방도를 찾기 어렵다. 그건 정말 '운'의 영역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나는 정말로 운이 좋았다.
운도 운이지만, 교사로서 내가 기울인 노력 또한 무시할 수는 없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나는 언제나 '다정한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아이들에게 가식적이지 않은 '진짜 정'을 담뿍 주는 선생님이. 아마도 나의 학창 시절에 만났던 다정한 선생님들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내 가정환경을 아시고 뒤에서 표 나지 않게 챙겨주셨던 선생님들이나, 학업 스트레스로 학교에서 몇 번 쓰러졌을 때 나를 업고 병원까지 달려가 주신 선생님들, 담임 선생님도 아니신데 내 이름을 기억했다가 복도나 교무실에서 다정하게 불러주셨던 선생님들. 그분들의 다정함이 나를 여기까지 키워주셨다. 다정의 되물림이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브라이언 헤어, 베너사 우즈)'는 인류 진화 과정을 생물학적 측면에서 풀어낸 책이다. 책의 저자들은 그동안 '적자생존'이라는 전략으로 이야기되었던 인류 진화의 과정은 틀렸다고, 인류가 여기까지 발전하고 진화할 수 있었던 것은 호모 사피엔스의 '다정함' 때문이라고 말한다. 너무나 '다정한' 설명이지 않은가. 인류가 살아남아, 여기까지 진화할 수 있었던 것이 어떤 특별한 재능이나 기술, 비상한 두뇌나 냉철한 이성 때문이 아니라 '다정함' 때문이라니!
인류가 살아남은 이유와 마찬가지로, 교실도 그렇지 않을까. 교권이 바닥으로 추락하고, 아이들과 학부모는 더 이상 공교육을 신뢰하지 않는 지금의 현실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교실은 '다정함'을 지키는 교실이 아닐까. 아이들을 집단으로 보지 않고, 한 명 한 명 개별성을 가진 존재로 바라보는 것. 이름을 부르고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하는 것. 왜 못하느냐 묻지 않고,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 함께 고민하는 것. 아이들의 영역으로 거침없이 들어가는 것. 때로는 보고 싶은 않은 현실과 맞닥뜨리더라도 어른으로서 의연하게 대처하는 것. 성적에 등급에 휘청거리는 아이들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것. 그렇게 다정을 주고받으며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 서는 것. 그것이 가능하다면, 지금의 교실도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교직 생활에 언제까지 운이 따를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아주 조금의 운만 보태어준다면 계속해서 노력해볼 생각이다.
'다정한 교실이 살아남는다'는 믿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