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친구들이 있다. 친구라고 했지만 나보다 두 살, 일곱 살이 어린 동생들이다. 2014년도에 만났으니 햇수로는 십 년이 가까운 친구들. 학교에서 만났다면 까마득한 후배들이었겠지만, 사회에서 만나 친구 이상의 관계가 된 특별한 이들이다. 그들과는 첫 발령지에서 만났고 딱 1년 같이 근무를 했다. 함께 근무한 기간도 짧았던 데다 과목도 다르고 각자가 속한 부서도 모두 달랐던 우리가 어떻게 십 년 넘게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던 건지. 이런 게 정말 인연이라는 건지.
교차로 결혼과 출산을 하면서 한동안은 아예 만나지 못했고, 한동안은 아이들을 동행해야만 만날 수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휴직을 했을 때에는 한 집에 아이 다섯, 엄마 셋이 모여 하루를 보내는 일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우리는 동료에서 육아 동지가 되었다. 그게 우리의 십 년을 이어준 변곡점이었던 것 같다.
육아 동지로 거듭나면서 함께 키우는 마음으로 서로의 아이들을 보고 싶어 했다. 서로의 안부만큼이나, 아이들의 안부를 가장 먼저 묻는 사이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서로의 집안에 일어나는 대소사를 함께 챙겼다. 서로의 삶에 소용돌이가 치는 날에는 함께 울고 아파했다. 서로의 자존감이 바닥을 칠 때면 ‘너의 빛나는 때를 우리가 기억한다’며 무너진 마음을 도닥였다. 피를 나눈 자매처럼 서로에 기대어 주저앉은 몸을 일으키고, 마음을 털어내는 일이 잦았다.
실로 정말 오랜만에 셋이서 송년회를 했다. 아이들이 기관에 가있는 낮 시간도 아니고, 저녁 시간에 우리 셋이 만난 건 진짜 오랜만이었다.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만나기 전부터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도리가 없어 실시간으로 지금 어디쯤 왔는지를 공유했다. 너무 설렌다고, 너무 신이 난다고. 그런 서로가 너무 귀엽(?)다고. 쉴 새 없이 울리는 카톡 알림음에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약속 장소로 달렸다.
이게 얼마만이냐는 인사부터 시작해서 근황을 나누고 그간 못다 한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술잔을 기울이며 마음을 나누었다. 아무런 허물없이 삶을 이야기할 수 있는 이들과의 시간은 1분 1초가 귀했다. 모두 엄마로서의 자아가 강한 시기라 아이들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었지만, 결국 돌고 돌아 닿은 이야기를 학교 이야기였다.
학교에서 만나는 아픈 아이들. 마음이 아파 생활이 힘든 아이들. 그 아이들에게 어떻게 손을 내밀어주어야 할까.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수업이 무너지는 교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어야 할까. 도덕을, 국어를, 영어를 배운다는 것이 과연 아이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너무 이른 나이에 실패를 경험하는 아이들, 실패하면 다시 일어서기 어려운 아이들에게 우리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줄 수 있을까.
우리가 학교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교사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살아남는 그날까지 우리는 어떤 교사로 살아남아야 할까.
어떤 질문에도 명쾌한 답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우리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연대감은 확인할 수 있었다. 나만 애쓰고 있는 게 아니라는 안심, 나만 허둥거리는 건 아니라는 확신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느낄 수 있었다. 누구와도 쉽게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아무런 평가나 판단 없이 나눌 수 있는 이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안도가 스몄다.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 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김사인, <조용한 일>
그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마음에 피어난 시 한 편. 그들을 떠올리면, ‘고맙다’는 말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들이 언제나 내 곁에 조용히 머물러주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뭐라 더 보탤 것도 없이, 그저 언제 어떤 순간에도 말없이 곁을 지켜주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아직 몇 번의 송년회가 더 허락될지는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그래서 기도한다. 아주 오랫동안 그들과 지나간 해를 보내며 술잔을 기울일 수 있기를. 잔을 부딪히며 그 해의 슬픔을 무사히 보내주고, 그 해의 기쁨을 온전히 되새길 수 있기를. 지금처럼 서로의 깊은 고민을 고요히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우리가 되기를.
해가 바뀌기까지 딱 하루의 시간이 남았다. 사실 별다를 것 없는 일요일일 테지만, 12월 31일이라는 날짜가 주는 힘은 실로 대단하다. 내일 하루가 지나면 2023년은 묵은 해가 되고, 새해가 밝을 것이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인 내일은 모두가 고마운 이들과 함께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서로의 마음 곁을 가만히 지켜주는 귀한 인연들과 저무는 해를 보내고 밝아오는 해를 맞이한다면, 새해는 조금 더 나은 해가 될지도 모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