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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Jul 15. 2024

아이들과의 잠자리 대화에서 죽음을 떠올리다

엄마, 천팔백몇 년도에 태어난 사람도 있어?
응? 갑자기 뜬금없이? 그때도 사람이 태어났지. 다만 그때 태어난 사람은 지금까지 살 수 없는 거지.
왜 못 살아?
사람은 아무리 오래 살아도 100살을 넘기 힘들어.
왜?
사람 몸의 기능이 그렇대. 엄마도 100살 넘는 사람은 만나본 적이 없어.
그럼 엄마도 100살 되기 전에 죽어?
아마도? 엄마도 그쯤 되면 하늘나라로 가겠지?
안돼. 엄마. 엄마는 죽지 마.
죽지 않는 건 엄마의 뜻대로 할 수 없지만, 살아 있는 날까지는 건강할게. 그래서 엄마 요즘 운동 열심히 하잖아.
그래도 엄마 없는 건 너무 슬퍼.
엄마도 그런 생각하면 슬퍼. 엄마가 하늘나라에 가게 되더라도 너희 마음속에선 영원히 살아 있을 거야. 그건 약속해.
안 돼. 엄마. 마음속에 있으면 만날 수는 없잖아. 엄마 냄새도 맡을 수 없고. 그니까 엄마는 이백 살, 아니 천 살까지 살아.
천 살은 좀…. 그런데?
우리 다 천 살까지 같이 살자. 응?


하루 중 가장 마음이 말랑말랑 해지는 시간. 바로 잠자리에 누웠을 때이다. 아이들도 그런지 잠자리에서는 종일 하지 않던 애정표현도 서슴없이 하고, 선뜻 털어놓지 않던 학교 생활, 유치원 생활 이야기도 속속들이 한다. 오늘 잠자리에서는 뜬금없이 몇 살까지 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더니, 죽음에 관한 이야기까지 갔다.


나는 아이들과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피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편이다. 삶과 죽음은 분리할 수 없고,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불행이 닥치지 않는다면 나는 아이들보다 빨리 삶을 마감하게 될 것이므로. 그게 언제가 되더라도 슬프고 아픈 마음은 어쩔 수 없겠지만 너무 무력해하지는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그런 마음을 아는 것인지, 아이들은 저희들 수준에서 할 법한 질문들로 종종 죽음을 묻는다. 더불어 나이 듦에 관해서도. 엄마도 죽느냐고 묻기도 하고, 저희가 몇 살이 되면 엄마는 몇 살이 되는지 묻기도 한다. 엄마는 할머니가 안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비치기도 했다가, 엄마는 어떤 할머니가 되고 싶은지 질문하기도 한다. 원래도 죽음을 생각하며 사는 편이지만, 아이들 덕분에 더 구체적으로 떠올려 볼 때가 많다. 나의 노년과 죽음에 대해.


삼십 대까지만 해도 노년이 아득했다. 오히려 죽음이 더 선명했다. 죽음에는 여러 변수가 있을 수 있으니, 젊다고 해서 죽음을 무조건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노년은 무사히 나이 들어가야 했고, 사십 대를, 오십 대를, 육십 대를 순서대로 잘 지나가야 맞이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죽음은 언제고 닥칠 수 있는 일이었지만, 노년은 생각할수록 어렴풋하기만 한 것이었다.


사십 대에 접어들면서 노년을 자주 생각한다. 요즘은 육십 대도 노년이 아니라고들 하지만, 교사의 정년이 (현재 기준으로) 만 62세임을 감안하면 육십 대부터는 조금 다른 삶이 펼쳐질 것이다. 물론 정년까지 교직에 있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무사히 정년퇴직을 한다면 그 이후의 삶은 노년의 삶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어떤 변수도 없이 노년을 맞이하는 행운이 내게 있다면, 몸과 마음이 건강한 할머니가 되는 것이 가장 큰 소망이자 목표다. 엄마가 할머니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아이들에게 왜 엄마가 할머니가 되는 게 싫으냐고 되물었더니, 할머니가 되면 같이 놀러도 못 다니고 맛있는 것도 같이 못 먹을 것 같아서라고 했다. 그러니 할머니가 되더라도 열심히 같이 시간을 보내고 부담 없이 맛있는 것을 나누기 위해서 지금의 건강을 잘 유지해야 할 책임감을 느낀다. 때문에 요즘 나는 주 5회 필라테스 수업을 받고, 주 6회 이상 유산소 운동을 한다.(거의 매일 한다는 말이다.) 몸에 나쁜 음식은 멀리하고 식사량도 조절하고 있다.


운동으로 육체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면, 열심히 읽고 쓰는 생활로 마음의 건강도 지키고 싶다. 최근 큰 우울의 산을 넘어오며, 아무리 열심히 읽고 써도 한순간에 마음의 건강이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그래서 읽고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허무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돌아온 자리에서도 나는 여전히 읽고 쓰는 삶을 사는 중이다. 마치 이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듯이. 이것보다 내 마음을 지키는 더 좋은 방법은 알 수 없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그리고 당연하게.


몸과 마음이 건강한 할머니가 되어 그때도 아이들과 손을 잡고 데이트를 하는 꿈을 꾼다. 가끔 떠난 여행지에서 지금처럼 한 방에 나란히 누워, 그때는 조금 더 실감 날 ‘죽음’에 대해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꿈도 꾼다. 엄마가 여전히 곁에 있어서 좋다는 고백을 듣는다면 충분히 행복할 것 같다. 그럼 나도 말해줘야지. 지금껏 엄마 곁에서 아들로, 딸로 잘 자라주어서 정말 고맙다고. 엄마가 떠난 이후에도 지금처럼 많이 웃고 행복해했으면 좋겠다고.


그때가 되면 내가 죽음을 말해도 아이들은 더 이상 엄마가 천 살까지 살았으면 좋겠다며 떼를 쓰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에 나의 아들 딸로 살아온 순간들은 대체로 좋은 날들이었다고, 앞으로 나의 아들딸로 살아갈 모든 순간은 더 좋은 날들이길 바란다고 말해주면 더할 나위 없겠다.


상상만으로도 울컥하지만, 그 밤은 분명 오늘 밤만큼이나 행복한 밤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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