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차] 인생은 계획대로 흐르지 않는다.

by 진아


몇 달 전부터 준비한 여행이었다. 해외여행도 아닌데, 한 달짜리 여행이라니. 여행지-특히 제주-에서 한 달 살기가 유행한 지는 꽤 되었지만, 직장 생활에 육아에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올해, 어쩌면 교직 인생 마지막 휴직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큰 마음을 먹고 한 달 살기를 준비했다. 아이들에게 평생 잊지 못할 좋은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나에게도 쉼과 여유를 선물하고 싶었다. 육아에 매진한 5년과 육아와 일을 병행하던 2년에 대해 스스로가 주는 보상이랄까.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은 예상보다 훨씬 순탄했다. 눈여겨보던 숙소를 원하던 날짜에 예약할 수 있었고 항공편이나 탁송 등도 수월하게 예약했다. 두 아이를 혼자 데리고 떠나는 긴 여행이라 걱정이 없지는 않았으나, 여행을 기다리는 시간은 대체로 설레고 두근거렸다.


출발 하루 전, 이삿짐 수준의 짐을 실은 차를 배편에 먼저 보내고 나니 떠난다는 게 정말 실감이 났다. 어린 시절부터 여행을 꽤 다녀왔다고 생각했으나 한 달짜리 여행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결혼 전에 친한 동료들과 삼주 정도 유럽 여행을 다녀온 적은 있었지만, 국내를 한 달 동안 여행한다니. 말이 여행이지, 한 달 ’살기‘였으므로 특별한 계획 없이 흐르는 대로 가는 여행을 꿈꿨으면서도 막상 하루 전이 되자 ‘내일 가서 뭐부터 해야 하지? 애들이랑 어디를 가야 하지?‘ 초조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한 달이니까. 한 달 동안이나 머물 거니까. 안되면 숙소에서 하루이틀은 쉬어가면 되지.‘ 마음을 다잡았다.


여행 하루 전날 밤. 푹 자고 싶었지만 출간 준비 중인 원고를 최종 탈고해야 했다. 여행을 계획할 때만 하더라도 이렇게 시기가 겹칠 줄은 몰랐는데, 어떻게 딱 출발 전날에 최종 원고를 보내기로 약속을 해버렸는지. 여행짐을 싸다가 원고를 고치다가, 다시 원고를 고치다가 여행짐을 싸기를 반복해야 했다. 결국 여행짐을 보내고 나서야 집중해서 원고를 볼 수 있었고, 새벽 두 시가 훌쩍 넘어서야 겨우 잠자리에 들었다.


떠나는 날 아침을 산뜻하게 시작하고 싶었지만 산뜻은커녕 컨디션이 정말 좋지 않았다. 병원에 다녀와야 하나 생각할 정도였으니. 지끈거리는 머리와 욱신거리는 몸을 참아가며 떠날 준비를 했다. 나는 그런 상태였더라도 아이들은 신이 나있을 줄 알았다. 나보다 일찍 일어난 아이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 오늘따라 더 짜증스러웠다. 서로에게 어찌나 뾰족한지, 무슨 말만 해도 날을 세우며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다.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우는 아이들을 애써 모른척하다가 결국엔 나도 폭발해 버렸다. 정말 이런 식이면 한 달 동안 여행 가는 일은 없던 일로 하겠다며 엄포를 놓고서야 겨우 아이들의 싸움이 일단락되었다. 더는 집에 두면 안 될 것 같아서 바로 공항으로 출발했다.


오늘따라 첫째 아이는 공항에서도, 비행기에서도, 무사히 제주에 도착해서도 짜증스러웠다. 어떤 말에도 예민하게 반응했고, 동생의 한 마디에도 발끈해서 화를 냈다. 오늘 제주 날씨는 그다지 덥지 않았는데 내내 덥다고 짜증, 바다에서는 모래가 묻어서 싫다고 짜증, 그래도 잘 놀고 나와서는 기분이 좀 좋아졌을까 했는데 이내 춥다고 짜증, 숙소에 도착해서는 숙소가 좁다고 짜증, 공놀이를 할 공간이 없다고 짜증….. 아이의 짜증을 받다 받다 정말 이 여행을 왜 왔을까,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누가 시키긴커녕, 권한 적도 없는 여행이었다. 내가 가고 싶어서, 내가 좋아서 계획하고 떠난 여행이었다. 아이들도 좋아하는 제주였고, 꿈꾸던 한 달 살이었다. 그래서 선뜻 마음 냈던 여행이었는데. 이곳에의 첫날은 이럴 계획이 아니었는데. 설렘과 두근거림을 만끽하며 신나게 웃고 행복하게 떠들고 싶었는데. 정말 그러려고 했는데. 그럴 거라 확신했는데.




무엇 하나, 내 마음 같지도 내 계획에 맞지도 않았던 여행의 첫날밤을 정리하며 오늘 발견한 문장을 쓴다. ‘인생은 계획대로 흐르지 않는다.’ 계획은 말 그대로 계획일 뿐. 계획의 사전적 의미는 ‘앞으로 할 일을 미리 헤아리는 것.’이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 이후를 헤아리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은 언제나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


인생이 계획대로 흐르기를 바란 때가 있었다. 바랐다기보다는 믿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내가 계획한 대로, 그 방향으로 흐를 것이라는 믿음은 어떤 일을 열심히 해내는 동력이 되었다. ‘내가 이렇게 하면 나는 거기에 닿을 거야. 내가 저렇게 하면 나는 그 사람과 인연이 될 거야. 내가 그렇게 하면 나는 그 마음을 얻을 거야.‘ 내가 세운 계획을 믿고 나아가다 보면 정말 어딘가에 닿았고, 누군가를 만났고, 누군가의 마음을 얻었다.


마흔을 넘긴 요즘, 지금껏 인생이 계획대로 흘러온 것이 지극히 우연한 일이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인생은 결코 계획대로 흐르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든 예측하지 못했던 변수가 나타나고 그것은 인생의 방향을 송두리째 바꾸기도, 인생의 흐름을 막아서기도 한다. 요즘 나는 여러 상황에서 변수와 마주하는 중이다. 계획에 없던 일들, 생각지 못한 사람들을 맞닥뜨리며 어떤 날은 마음에 폭우가 내리치고 어떤 날은 별이 쏟아지며 어떤 날은 꽃잎이 흩날린다.


계획대로 흐르지 않는 게 생이라면, 계획 없이 흘러가보는 수밖에. 두 아이와 떠나온 이 긴 여행도 내 계획대로는 하나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저 하루하루를 무사히 보내는 수밖에 없다. 이 여행이 끝나는 날 밤, 우리가 이 여행을 그리워할지, 여행의 끝을 홀가분해할지 알 수 없다. 미리 짐작하지도 말고 그냥 이 여행을 온전히 즐겨야지. 내 삶도 이 여행처럼 그저 흘려보내다 보면 또 어딘가에는 닿아있을 것이다. 그때 지금의 이 시간을 그리워할지, 후회할지 알 수는 없지만.




정말 힘든 하루였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하루의 사진첩을 들여다 보니 또 뭉클하다. 그래도 잘 흘러왔구나 싶다. 심지어 지금 나는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혼자 한라산을 따는 중이다. (실로 오랜만에 혼술이군.) 이렇게 완벽하게 평화로운 마무리라니.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아도 꽤 괜찮은 마무리를 할 수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