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여름 날씨는 변화무쌍하다. 짧은 여행으로 제주에 왔을 때는 이 변화무쌍한 날씨가 원망스러웠다. 길어야 4박 5일짜리 여행인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거나 천둥 번개가 치기 시작하면 여행 일정을 모두 취소해야 했으니. 바다 물놀이를 나갔다가 급하게 숙소로 돌아와야 했을 때, 큰 마음먹고 자연 명소를 찾아갔는데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다시 차에 올라야 했을 때. ’도무지 날씨가 도와주지 않는구나.‘ 한숨 쉬던 일이 종종 있었다.
한 달 살기 둘째 날, 변덕스러운 제주 날씨를 제대로 경험했다. 아침을 먹고 아이들과 ‘오늘 뭐 하지?’ 이야기하다 또 바다 물놀이를 하기로 했다. 날씨를 검색해 보니 오후 1시경 비 예보가 있었다. 그때 시간이 오전 10시였으니, 두 시간 바짝 놀고 숙소로 돌아오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들뜬 마음으로 아이들과 래시가드를 챙겨 입었다.
모래놀이 도구에 물총, 구명조끼, 아쿠아슈즈, 수건, 비치가운, 씻을 물, 간식, 파라솔 대용 우산, 마실 물까지. 카트 2개를 꽉 채워 물놀이 짐을 챙기고 주차장으로 갔다. 그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 쾅쾅!” 천둥소리와 함께 번쩍, 번개가 쳤다. 래시가드를 챙겨 입을 때만 해도 분명 창밖에 푸른 하늘이 언뜻언뜻 비치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 걱정도 하지 않았는데! 일단 짐을 싣고 아이들과 차에 올랐다. 그때, 천둥 번개가 다시 한번 내리쳤고 곧 빗방울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이런 날씨에 바다라니, 물놀이라니. 이미 준비를 다 해서 내려왔지만 아이들을 설득해서 다시 숙소로 올라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에게는 오늘이 마지막날이 아니니까 아쉬움이 덜했다. 아이들에게 천둥 번개가 치기 시작해서 바다는 못 가겠다고, 숙소로 들어가서 다른 갈만한 데를 알아보자고 했다. 두 아이는 한 목소리로 “싫어!!!”라며 거부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몇 번이나 천둥이 울리고 벼락이 내리쳤다. 이미 하늘은 곧 폭우가 쏟아질 것 같은 먹색 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어차피 몇 시간 후에 비 예보가 있으니 이런 날씨를 감수하면서까지 바다에 가는 건 무리겠다고 판단했다. 거부하는 아이들을 어떻게든 설득해보려 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때 첫째 아이가 건넨 한 마디에 결국 시동을 걸고야 말았다.
“엄마, 일단 가보자! 비가 갑자기 왔으니까 갑자기 그칠 수도 있잖아.”
차를 몰고 바다까지 가는 십여 분 동안 비는 장대비로 바뀌었다. 얼마나 세차게 내리는지 와이퍼를 최고 속도로 켜도 쏟아지는 비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첫째는 자기가 우겨서 출발을 했는데 비가 너무 심하게 오자 괜히 미안하고 머쓱한지 딴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거봐라, 엄마가 이렇게 폭우가 쏟아질 거라고 했지, 그냥 숙소에서 어디 갈지 고민해 보자니까.’ 하나마나한 잔소리가 입안 가득 맴돌았지만 꾹 참았다. 대신 “그래, 뭐 비구경이나 실컷 하자! 비 오는 바다도 꽤 멋질 거야!!”라며 호기롭게 바다로 달렸다.
멀리 김녕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랏?’ 서서히 빗줄기가 약해지는 것이 아닌가! 저 먼바다 위로는 푸른 하늘이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진짜 비가 그치려나, 기대하며 서서히 주차장에 진입했다. 짐을 내리는 잠깐 동안만 가는 빗줄기가 이어졌고 이후 바다에서 보낸 3시간 동안 비가 오기는커녕 먹색 구름도 흔적을 감추었다.
“엄마 우리 오길 참 잘했다! 그치?”
여행지에서 맞는 둘째 날 밤. 오늘 발견한 문장을 쓴다.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생각해 보면 이십 대 초반까지 많은 일들이 그랬다. 해보지도 않고 지레 겁먹고 물러선 일들이 많았다. 실수하고 싶지 않았고 실패가 두려웠으니까. 뭐든 잘하고 싶었고 누구에게라도 좋은 평가를 듣고 싶었으니까. 안될 것 같으면, 못할 것 같으면 하지 않기를 선택했다. 그게 제일 쉬운 선택이자 가장 덜 잃는 선택이라고 믿었다.
지금의 나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여전히 실수도, 실패도 두렵다. 해보지 않아도 충분히 실패가 짐작된다면 안 하는 쪽을 선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안 될 것 같은 일을 되게 하는 것보다, 안 될 것 같은 일은 하지 않는 편이 익숙하다. 지인들은 내가 뭐든 선뜻 잘 도전하고 실천하는 행동파라고 생각하지만, 고백하자면 내가 도전하고 실천하는 일들은 내 안에서 ‘해볼 만하다’고 판단한 일이다. 해보지 않아도 좋은 결과가 짐작되는 일. 그래서 실수도 실패도 감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일.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오늘, 갑자기 변한 날씨에 바다에 가기를 포기했다면 아름다운 김녕 바다에서 물놀이를 한 추억은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오늘 못 가면 내일 가면 되고, 내일 못 가면 모레 가면 되지만. 적어도 오늘, 2024년 8월 15일의 기억에 아름다운 김녕 바다는 없었겠지. ‘비 내리는 바다라도 보고 오자’라는 마음으로 갔던 바다에서 나와 아이들은 잊지 못할 여름날의 추억을 새겼다. 일단 해봤기에 아름다운 추억의 한 페이지를 채울 수 있었다.
어쩌면 앞으로도 나는 종종 해보지 않기를 선택할지도 모른다.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용기내기 어려운 순간이 많을 것이다. 관성이랄까. 사십 년을 그렇게 살아왔기에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을 안다. 그래도 해보지 않고 멈추려는 마음이 들 때면, 오늘의 에메랄드 빛 김녕 바다를 기억해야겠다.
정말로, 해보지 않으면 영원히 알 수 없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