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째 물놀이를 못 했더니 아이들도 나도 몸이 근질거렸다. 오늘은 기필코 바다에 뛰어들어야지 다짐했는데, 웬걸. 아침부터 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늘은 맑은데 장대비가 쏟아지는 희한한 제주 날씨를 또 한 번 목격하며 오늘도 물놀이는 물 건너갔구나, 했다. 그럼 뭘 하며 하루를 보내볼까 즐거운 고민을 하는 중에 제주에 사는 친한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니는 몇 년 전 제주 일 년 살이를 계획하고 입도했다가 수 년째 이곳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이번에 제주 한 달 살이를 계획하는 데 언니의 존재는 큰 힘이 되었다. 적어도 제주에 아는 사람이 한 명 있다는 사실, 그것도 아주 가까운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낯선 환경에 대한 두려움을 반감시키기에 충분했다.
제주에 온 지 9일 만에 언니와 만났다. 맛있는 식사를 하고, 그동안 못다 나눈 이야기를 실컷 나누었다. 작년 여름휴가 때 만나고 꼭 일 년 만에 만났지만 어제 만난 것처럼 자연스럽고 편안했던 시간이었다. 언니와의 인연은 17년 전, 대학원 1년 차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언니는 나의 연애사를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이고, 나는 언니의 결혼 과정을 지켜본 사람이다. 각자 삼십 대에 접어들고 언니가 결혼을 해 다른 지역으로 옮겨간 후에는 꽤 오랫동안 안부조차 묻지 않는 사이로 지냈다. 마음이 없어서 묻지 않은 것이 아니다. 어디에 있든 늘 마음 한 편에 언니가 있었고, 아마 언니에게 나도 그랬을 것이다. 그 믿음이 확고했기에 굳이 자주 연락하고 만나지 않아도 인연의 끈은 끊어지지 않았다.
언니가 제주살이를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날, 나는 수년 만에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때도 마치 어제 통화했던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럽게 오랜 통화를 했고, 몇 년 뒤 휴가 차 제주에 왔던 나는 언니와 만났다. 십 년도 더 지난 만남이었는데,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언니를 만나지 않고 살았던 십 년이 어떻게 가능했나 싶을 정도였다.
이십 대에 만난 우리는 이제 사십 대가 되었다. 연애와 결혼, 취업이 고민의 전부였던 이십 대를 무사히 보내고 치열했던 삼십 대를 거쳐 사십 대에 도착했다. 신기한 것은 둘 다 비슷한 시기에 ‘어떻게 사는 삶이 행복한 삶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무엇을 할 때 행복을 느끼는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언니는 그 답을 찾기 위해 제주에 왔고, 나는 글쓰기를 시작했다. 각자가 선택한 방법은 달랐지만,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것은 같았다.
오늘 두 아이는 언니의 아이들을 ‘형’, ‘오빠’라 따르며 잘 놀아주었고, 덕분에 나와 언니는 한참을 마주 앉아 못다 한 이야기를 실컷 했다. 하고 또 해도 부족했지만, 얼마 만에 언니와 이렇게 깊은 이야기를 해보나 싶어 그 시간이 무척 귀하게 느껴졌다. 여전히 우리의 고민은 현재진행형이지만, 지금까지 우리 두 사람이 내린 답은 신기할 정도로 같았다.
’행복하게 살려면 결국 나 스스로 바로 설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다른 데서 행복을 찾지 말고 오직 나로서 행복하자!
평소보다 조금 늦게 잠자리에 든 아이들에게 잘자라는 인사를 하고 나왔다. 이제는 익숙한 내 자리, 식탁에 앉아 오늘의 문장을 쓴다. 오늘의 문장은 소설 <내가 되는 꿈>(최진영)에 나오는 문장, ‘내가 될 수 있는 건 나뿐이다.‘ 이다. 이 문장의 앞과 뒤에는 이런 문장이 연결되어 있다. ‘아무도 내가 될 수 없고 나도 남이 될 수 없다. 내가 될 수 있는 건 나뿐이다. 자칫하면 나조차 될 수 없다.’ <내가 되는 꿈>은 최진영 작가님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라 몇 번을 다시 읽었다. 그때마다 한 번도 빠짐없이 밑줄을 긋고 소리 내어 읽어 본 문장이다.
아무도 내가 될 수는 없다. 당연히 나도 남이 될 수 없다. 이 말을 이해하는 데에는 꽤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어릴 때 이 문장을 만났다면 무슨 소리인가, 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당연히 ‘나’인데, 내가 된다니. 이미 ‘나’인데 또 무슨 내가 된다는 말인지.
이제야 어렴풋하게 ‘나’가 되는 것에 대해 알 것 같다. 선망하던 ’남‘과 같아지고 싶어 애쓰던 시간이 길었다. 남과 같아지는 것이 내가 되는 길이라 믿었다. ‘나’를 들여다봐야 할 시간에 ‘남’을 기웃거렸고, ‘나’를 숙고해야 할 시간에 ‘남’을 부러워했다.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며 내가 사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렇게 온전한 ’나‘가 되기 위해 고민하는 시간을 내기까지는 수많은 시련이 필요했다. 삶이 던지는 문제들을 하나하나 마주하며 ‘이러다 자칫하면 나조차 될 수 없겠구나‘ 두려움을 느끼고서야 ’나‘의 행복, ’나‘의 삶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언니와 나는 천천히 ’내가 되는 꿈‘을 꾸는 중이다. 나로서 행복하기 위해, 좋아하는 일을 찾고 좋아하는 사람과 인연을 지키려 애쓰고 있다. 이십 대와는 다른 이유로 꽤 치열한 사십 대를 살아가고 있다.
“진아야, 내가 알던 스물넷의 너와 지금의 네가 조금 달라진 것 같아서 괜히 눈물이 난다.”
말끝에 언니가 보인 눈물이 나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모른다. 이십 대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당차고, 주도적이며, 독립적이었다.(지금의 나와 새로이 인연이 닿은 분들은 의아할지도 모른다. ‘지금보다 더 그랬다고?’라고 생각하실지도. 그런데 그때는 더했답니다.^^;;) 언니는 내가 어딘지 모르게 힘들어 보인다며 나 대신 울어주었다. 언젠가부터 눈물샘이 말라버린 나는 언니의 눈물이 마냥 고마웠다. 나의 빛나는 과거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나의 아픔을 알아주고 대신 울어주는 일이라니.
지금 나는 이십 대의 나를 회복하며 거기에 더 나아진 현재의 나를 덧입히는 중이다. 꽤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이십 대의 독립심과 주도성을 회복하고, 최근 들어 다지게 된 사십 대의 자기애와 자기 존중을 덧입히고 있다. 그렇게 조금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자칫하면, 나조차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품고서.
내가 되는 꿈을 이루고 싶다. ‘내가 될 수 있는 건 오직 나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