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언니네에서 늦게까지 놀다 온 바람에 아이들은 평소보다 잠자리에 늦게 들었다. 집에서는 아무리 늦게 자도 일찍 일어나던 아이들인데, 어쩐지 제주에 와서부터는 가끔 늦잠을 자기도 한다. 우리 아이들에게 늦잠이라고 해봐야 9시쯤이지만, 집에서는 그 시간까지도 자본 일이 거의 없다. 이곳에서 정말 열심히 놀고 있긴 한가 보다.
아이들이 늦잠을 자준 덕분에 나도 느긋한 아침을 맞았다. 셋이서 끌어안고 침대를 뒹굴다가 겨우 몸을 일으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빵을 구워 간단히 아침을 먹고 아이들이 어제 못쓴 일기를 쓰는 동안 집 정리를 했다. (이제 숙소라기엔 제법 집처럼 느껴져서 수시로 청소기를 돌리고 물걸레질을 하지 않으면 머리카락과 먼지가 굴러다니는 게 눈에 보인다.) 각자가 할 일을 끝내고 우리 셋은 오랜만에 좀 달려보기로 했다.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제주에 와서 가장 놀라운 것 중 하나가, 번잡한 해수욕장 근처를 아주 조금만 벗어나도 어디에 번잡한 곳이 있었나 싶을 만큼 고즈넉한 마을 혹은 산길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덕분에 눈에 보이는 빛깔은 온통 초록이다. 봄과 가을, 겨울의 제주는 또 다른 빛깔이겠지만 여름의 제주는 그야말로 초록초록하다. 내가 있는 곳 주변은 어딜 봐도 귤밭인데, 아직 익지 않은 귤조차 나뭇잎과 구분이 잘 되지 않을 만큼 짙은 초록빛이다. 초록을 하도 많이 봐서 그런가, 제주에서의 열흘은 내 생에 손꼽힐 만큼 편안한 날들이었다.
초록귤들이 노랑, 주황으로 익어가는 것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달렸다. 아이들은 킥보드를 타고, 나는 두 다리로 씩씩하게!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을 때쯤 집으로 돌아왔다. 셋이서 번갈아 가며 샤워를 하고 시원한 물을 한 잔씩 마셨다. 아이들이 블록놀이를 하는 동안 나는 어제 사온 책을 읽었다. 창밖에는 자연의 소리만 들렸고, 집안에는 두 아이가 재잘재잘 떠드는 소리와 음악 소리만 들렸다. 이토록 고요하고 평화로운 시간이라니.
소박한 점심을 차려 먹고 “이제 어디론가 나가볼까?” 했더니, 노루들이 뛰어논다는 ‘거기’에 가자고 했다. ‘거기’가 어디일까 잠시 생각해 보았다. 며칠 전에 언뜻 들려준 자연생태공원을 말하는 거였다. 아이들과 간식까지 두둑하게 챙겨 먹고 늦은 외출을 했다. 자연생태공원은 야생에서 다친 동물들을 구조해서 임시로 돌보는 곳이라고 했다. 동물들을 그저 전시하는 곳이 아니라 끝내 야생으로 돌려보낼 목적으로 운영되는 곳이라고 하니 동물원을 싫어하는 나도 마음이 났다. 규모가 큰 편은 아니라 금방 둘러볼 수 있었지만, 덕분에 귀한 반달가슴곰도 네 마리나 보았다.
아이들과 장을 보고 금요일이라고 육지에서 온 남편과 만나 제주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은 늘 하던 대로 오늘 하루 중 가장 기억나는 일로 그림일기를 쓰고 평소와 비슷한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다.
이곳에서의 열 번째 밤을 맞이하며 오늘의 문장을 쓴다. ’중요한 것은 오늘 일어나는 일이다‘ 오늘의 중요성을 말하는 문장은 많고도 많다. 고전소설과 현대소설, 인문서와 자기 계발서, 시에서까지. 어떤 글에도 ’오늘이 중요하다‘는 문장은 흔하게 쓰인다. 그래서인지 이 문장의 무게가 가볍게 느껴질 때도 있다. 정말 중요한 것을 알지만 너무 자주 들으니 오히려 그 의미가 퇴색되는 느낌이랄까.
‘오늘’의 중요성을 말하는 여러 책들 중 나에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책은 <그리스인 조르바>(니코스 카잔차키스)이다. 조르바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오늘의 문장을 여기서 부분 인용했다.) 실제로 조르바는 오늘만을 살고, 그래서 매일 보는 모든 것을 마치 오늘 처음 보는 것처럼 놀라움과 감탄으로 대한다. 지나간 어제는 후회하지도 자만하지도 않는다. 오지 않은 내일은 염려하지도 기대하지도 않는다. 오직 ‘오늘, 이 순간’에 충실하고 집중한다.
제주에 와서 내 일상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어제를 곱씹지 않고, 내일을 계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파워 J형 인간이라(MBTI에서 계획과 즉흥을 나타내는 J와 P 중 거의 절대적으로 J 쪽에 가깝다), 어떤 일에도 계획이 필요한 사람이다. 돌발 상황을 두려워하고 그래서 사전준비도 꽤 철저한 편이다. 물론 단기간 여행에서만큼은 일시적 P형 인간이 되기도 하는데 일상적인 상황에서는 무언가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일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제주 한 달 살기 여행을 결정했을 때만 하더라도 ’여행‘에 방점이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계획을 세우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었다.(여행 한정 P형 인간!) 그러나 막상 제주에 오고 나서부터는 ’살기’에 방점이 찍히면서 이 일상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마음이 조급해지곤 했다. 제주 맛집, 제주 가볼 만한 곳을 수시로 검색하는 나를 발견할 때마다 화들짝 놀라며 제발 이번 한 달만은, 이곳에서의 일상만은, 진짜 아무런 계획 없이 살아보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나의 일상은 대체로 J에 가까워서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고 잠이 든다. 비슷한 시간에 같은 자리에 앉아 글을 쓰고 책을 읽는다. 전체적인 일상의 틀은 계획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날마다 무엇을 할지는 그날 아침에 되어서야 때론 점심시간을 훌쩍 넘겨서야 정한다. 맛집을 찾지도, 카페를 찾지도, 가볼 곳을 찾지도 않는다. 지나가다 예쁜 카페가 있으면 차를 세우기도 하고, 친한 언니가 아침에 알려준 곳으로 무작정 차를 몰기도 한다.
어제 무엇을 했는지도, 내일 무엇을 할 것인지도 생각하지 않는 삶. 그날 아침 날씨 예보를 확인하고 아이들의 컨디션을 살펴 그냥 발길 닿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이는 삶. 말 그대로 오늘을 사는 삶. 생각해 보니, 이렇게 어제와 내일에 대한 아무런 고민 없이 매일매일을 충실하게 살아본 적이 있었나 싶다. 정말 조르바가 된 것처럼 ‘중요한 것은 오늘 일어나는 일’이라고 여기며. 매일 보는 집 주변의 풍경과 노을 지는 모습, 마을의 산책길을 새롭게 보면서.
이제 곧 해수욕장이 문을 닫을 시기라 아마도 내일은 물놀이를 할 것 같다. 하지만 이것도 내일이 되기 전에는 알 수 없다. 변화무쌍한 제주 날씨와 짐작할 수 없는 아이들의 컨디션이 어디로 튈지 모르니. 그러니 아무런 걱정도 기대도 하지 않기로 한다. 그저 내일 눈을 떠서 발길 닿는 곳으로 가보면 되지. 그렇게 중요한 ‘오늘’을 새날로 만끽하면 그만이다.
떠나온 그곳에는 여전히 후회하고 염려해야 하는 과거와 미래가 있다. 뭐, 산다는 게 다 그런 거니까. 오늘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늘 과거를 생각하고 미래를 자문하는 게 삶이니까. 제주에서 딱 일 년만 더 이렇게 ‘오늘’을 살아보고 싶다. 벌써 열흘이 흘렀다니 믿을 수 없다! 남은 스무 번의 ‘오늘’도 다시없을 오늘로 잘 살아야겠다는 다짐이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