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차] 깊이 상상할수록 더 사랑하게 된다.

by 진아

제주에 온 이래로 날씨가 가장 좋은 날이었다. 맑다가도 금세 비가 오고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종종 치는 제주에서 처음 맞은 ‘종일 맑은 날’이었다. 해도 너무 뜨겁지 않았고 바람도 적당히 불어온 날. 날씨가 도와준 덕에 오늘은 종일 바다에 머물렀다.


작년엔 가보고 반했던 세화 해수욕장으로 갔다. 제주 한 달 살기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은 작년 여름휴가 때 만난 세화 바다의 영향이 컸다. 사박 오일 일정으로 제주에 왔다가 우연히 세화 바다 근처에 숙소를 잡았고, 그 덕에 세화 바다를 실컷 누렸다. 그때까지 보아온 어떤 바다보다 아름다운 빛깔의 바다였다. 게다가 아이들이 놀기에도 천국이었다. 멀리는 파도 치는 꽤 깊은 바다가, 중간에는 모래사장이, 가까이에는 미처 썰물에 빠져나가지 못한 바닷물이 고여 물고기나 가재 등을 잡고 놀 수 있는 얕은 물까지 있었다.


여름휴가에서 돌아오고도 세화 바다를 잊지 못해 아이들과 자주 대화를 나누었다. ’세화 바다에 또 가고 싶다, 세화 바다 보고 싶다‘ 그렇게 노래를 부르다 끝내 제주 한 달 살이까지 계획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고민도 없이 세화 근처 숙소로 한 달 살이 집을 알아보았다. 그런데 마음에 꼭 드는 곳이 없었다. 결국 함덕 근처에 숙소를 잡았지만, 우리 마음 속 원픽은 언제나 세화 바다였다.


이런저런 이유로 제주에 온 지 열흘이 지나고서야 세화 바다에 갔다. 세화 바다의 물빛은 역시 아름다웠다. 모든 제주바다가 다 저마다의 빛깔로 아름다운데, 세화 바다도 그랬다. 연둣빛과 하늘빛을 조화롭게 섞고 햇빛 한 줌을 솔솔 뿌리면 세화 바다의 색이 되었다.


작년에는 바다의 물때가 간조였을 때라 바다 중간에 모래사장이 생길 만큼 물이 많이 빠진 상태였는데, 올해는 만조인 때에 방문했더니 바다 초입부터 수심이 꽤 깊었다. 아이들은 기대했던 물놀이와 조금 다른 물놀이를 즐겨야 했지만, 또 그런대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은 깊은 물에서 수영도 하고 튜브도 타고, 작은 모래사장에서 모래성도 만들며 잘 놀았다.



잘 노는 아이들 덕에 오랜만에 파라솔 아래 혼자 앉아 책 한 권을 뚝딱 읽었다. 며칠 전 제주의 ‘소심한 책방’에서 구입한 <이제 진짜 제주로 갑서>(정다운)라는 책이다. 제주에 왔으니 제주 이야기를 다룬 책 한 권은 읽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차에, 소심한 책방 SNS에 올라온 책 소개를 보고 바로 구입했다. 표지도 어찌나 예쁜지!


저자는 11년 전, 휴가차 왔던 제주에 마음을 뺏겨 아예 삶의 터전을 제주로 옮겼다고 한다. (나도 교직을 그만두고 이곳에 새로운 터를 잡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저자는 여행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제주 말고, 생활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제주 구석구석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제주에서 만난 여러 삼춘들(제주에서는 남녀를 불문하고 어른에게는 삼춘이라는 호칭을 쓴다고 한다)에게서 들은 ’진짜 제주 이야기‘는 저자의 문장으로 바뀌어 독자인 나에게까지 무사히 전달되었다.


종일 책 한 권에 마음을 뺏겨 아이들이 “엄마, 책은 나중에 읽고 바다에서 같이 놀자.”라며 조르는데도 “이까지만 마저 읽을게.”를 반복했다. 잠시 잠깐의 틈만 나면 책을 손에 잡고 페이지를 넘겼다. 제주의 몰랐던 이야기를 알게 될수록 제주에 빠져드는 나를 발견하면서. 결국 책에서 소개하는 식당에 가서 저녁까지 먹고서야 책을 덮을 수 있었다. 오늘 하루는 아름다운 세화 바다에서 ‘이제 진짜 제주로 갑서’라고 다정하게 말을 거는 책 한 권과 실컷 수다를 떤 기분이다.




책에 빠져 있던 하루인 만큼, 오늘의 문장은 <이제 진짜 제주로 갑서>에서 골라본다. ‘깊이 상상할수록 더 사랑하게 된다.’ 이 문장은 책의 에필로그에 나오는 ‘마을에 찾아갈 때마다 받았던 환대를 잊지 못할 것 같다. 덕분에 제주에 대해 깊게 상상할 수 있게 되었고, 더 친해졌다. 그리고 제주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라는 문장을 요리조리 이어 붙인 것이다. 책의 문장이긴 하지만, 책의 맥락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은 아니다. 깊이 상상한다는 건, 자꾸 생각하며 보이지 않는 면까지 보려 애쓰는 거니까. 그런 애씀은 사랑이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일이니까. 이미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작된 상상은, 그를 혹은 그것을 더욱 사랑하게 만든다. 사랑의 선순환이다.


제주와 책 이야기로 돌아가본다. 제주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이곳을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여행자의 마음이었을 때는 그저 아름다운 섬이었지만 (겨우 한 달일지라도) 사는 자의 마음이 되어보니 제주는 참 불편한 것도 많고 슬픔도 가득한 섬이다. 쓰레기 하나를 버리려고 해도 공동 처리장까지 차를 몰아야 하고, 버스의 배차 간격은 도시와 차원이 다르다. 도보로 이동 가능한 편의점이 없고, 배달 어플을 켜면 ‘펑’이라는 문구를 바로 마주하게 된다. (물론 내가 사는 곳이 그럴 것이다. 제주 도심은 전혀 다른 분위기니까. 아마 관광지가 몰려있는 중문 쪽만 해도 또 다르겠지.) 그뿐일까. 차로 이동을 하려고 산길에 접어들면,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4.3 유적지’라는 푯말을 만나게 된다. 곳곳에 공동묘지는 또 왜 그렇게 많은지.


일 년에 두 번씩은 제주에 오면서도 ‘진짜 제주’를 관심 있게 본 적은 없었다. 놀거리가 많고 볼거리가 많은 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번에 아주 잠깐이지만 생활인의 마음으로 제주를 누비며 이제야 ‘진짜 제주’가 알고 싶어 진다.(집에 가자마자 사놓고 읽지 못한 <제주도우다>(현기영)부터 읽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이 타이밍에 <이제 진짜 제주로 갑서>를 만난 건 운명이었다. 제주 동네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이야기들을 읽으며 내가 이제껏 보았던 제주는 무엇이었나 자주 생각했다.


책 속에는 4.3 사건처럼 말할 수 없이 거대한 슬픔을 품은 이야기도 있고, 초등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발견한 만장굴과 같이 반전 있는 이야기도 있다. 평대 바다에 표류한 보물선과 같이 흥미진진한 이야기도 있고, 제주 제2 신공항 건설로 어쩌면 사라져 버릴지 모르는 마을의 깊은 역사처럼 함께 고민하고 행동해야 할 이야기도 있다. 길게 머물러 보지 않았다면 결코 관심두지 않았을 이야기들. 그저 저 먼 섬의 전설 같은 이야기들.


아마 이제는 제주와 관련된 어떤 뉴스도 흘려듣지 않게 될 것이다. 아니다. 흘려듣지 ‘못하게’ 될 것이다. (‘안’과 ‘못’의 차이는 실로 크다.) 겨우 이 섬에 열흘 살았다고 이토록 깊은 사랑에 빠져버릴 수 있는지. 어쩌면 이곳에 있는 동안 다른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오직 이곳, 여기, 이 시간에만 집중하다 보니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자꾸만 제주의 숨은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이야기 속 사람들이 궁금하고, 그 장소에 가보고 싶다.


깊이 상상할수록 더 사랑하게 된다. 정말로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