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아 Aug 21. 2024

[8일 차] 여행은 성장이고 성숙이다.

벌써 여행의 사분의 일이 흘렀다. 4주를 계획한 여행에서 1주가 지나갔다니, 믿을 수가 없다. 아직까지 아이들의 입에서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이야기가 한 번도 나오지 않은 것을 보면 이번 여행은 꽤 성공적인 것 같다. 아이들은 매우 솔직해서 무언가가 조금만 불편하거나 지루하면 바로 티를 낸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집이 아닌 곳에서 먹고, 자고, 노는 시간이 마냥 좋은가 보다. 다행스럽다.


이번 여행에는 어디에 가겠다거나 무엇을 보겠다는 계획이 전혀 없었다. 대신 다른 계획이 몇 가지 있었다. 먼저 아이들과 매일 밤 일기를 쓰겠다는 것. 첫째 아이는 짧은 문장을 더한 그림일기를, 둘째 아이는 그냥 그림일기를 쓰기로 했다. 아이들이 나의 제안(아주 조금의 강제가 있었음을 고백한다…)을 받아들인 이유는 저희들이 쓴 일기로 책을 만들어주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매일, 30일 동안 그리고 쓴 일기를 스캔해서 포토북으로 출력하면 그럴싸한 여행 그림책이 될 것 같았다. 아이들은 저희들의 일기가 책이 된다는 말에 혹했고, 여행 와서 지금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그림일기를 쓰고 있다. (엄마가 책을 쓰는 사람이라 그런지 아이들도 그런 욕심이 있다.)


두 번째 계획은 아이들의 잠자리 독립이었다. 벌써 8살이 된 첫째와 6살인 둘째는 아직까지 잠자리 독립을 하지 못했다. 집에서는 어떤 말로 설득을 해도 ‘무섭다, 겁이 난다, 불안하다‘ 등의 이유를 대며 꼭 엄마든 아빠든 누군가는 있어야 잠을 잘 수 있다고 했다. 아들인 첫째는 특히나 아빠에게, 딸인 둘째는 특히나 나에게 집착했다. 첫째는 아빠와 신체 일부 중 어디라도 닿아야 잠을 잤고, 둘째는 내 눈썹을 만지작거려야만 잠을 잤다. 언제까지 같이 자겠냐 싶어 그냥 두었지만, 아이들이 눕는다고 바로 잠이 드는 건 아니라서 해야 할 일이 있을 때면 마음이 조급해지기 일쑤였다. 그렇다 보니 괜히 화를 내거나 윽박지르며 재우는 날이 잦았다. 어찌 되었든 아이들이 잠든 후 몸을 일으켜 내 할 일을 해내면 다행이었지만, 아이들을 재우다 함께 잠들어버리기라도 하면 꼭 처리해야 하는 일을 하지 못해 낭패를 겪는 날도 많았다.


여행을 떠나기 한참 전부터 아이들에게 제주도에 가서부터는 둘이서 잠자는 연습을 할 거라고 말해두었다. 왜 그래야 하냐고 묻는 아이들에게 이제 엄마 아빠와 떨어져 잠을 자는 연습을 할 때가 되었고,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해주었다. 익숙한 집에서는 연습이 힘드니, 새로운 집에서 도전해 보는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결론적으로 이곳에서 맞이하는 첫 번째 밤부터 아이들은 둘이서 잠을 잔다. 물론 엄마 아빠와 잘 때보다 훨씬 오랫동안 수다를 떨고 때로는 둘이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는 듯하지만, 그날 이후 여덟 번째 밤인 오늘까지 무사히 잠자리 독립을 이루었다.


두 계획 말고는 아무런 계획이 없던 여행. 지금껏 두 계획을 잘 지키고 있으니 이미 완벽한 여행이다. 그러니 이제부터 경험하는 모든 일들은 덤으로 주어진 행복인 셈이다. 오늘의 덤은 태풍의 여파로 바다 물놀이가 힘들 것 같아 국립 제주 박물관에 간 일이었다. 국립 제주 박물관은 관람료가 무료였는데, 이런 곳이 무료여도 되나 싶을 정도로 알찬 곳이었다. 어린이 박물관은 규모가 크지 않았지만 소소하게 체험할 것이 많았고, 제주의 모습을 담은 디지털 영상은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압도적이었다. 상설 전시도 꽤 많은 유물이 전시되어 있어 둘러볼 만했다.


박물관에 간 일이 덤으로 얻은 행복인 이유가 있다. 8살이 된 첫째는 언젠가부터 기호가 매우 분명해져서 스포츠체험 시설이나 대형 놀이터가 아니면 시시하다거나 지루하다며 가는 것 자체를 거부했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오늘 아침에 제주 박물관에 가자고 했을 때 아무런 거부 반응이 없었고, 가서도 너무 재밌게 잘 즐겨주었다. 여행이 선물한 경험인 것이다. 새로운 곳에 가보고 새로운 일을 시도하는 것. 좋아하는 일이 아니라도 일단 해보는 것.





오늘 종일 머릿속을 맴돈 문장은 ‘여행은 성장이자 성숙이다’이다. 겨우 며칠의 여행에서는 성장과 성숙을 이루기 어렵다. 짧은 여행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일상의 고난을 잠시 잊는 망각이나, 일상적 스트레스의 일시적 치유이다.


긴 여행의 매력은 여행을 통해 성장과 성숙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게 아닐까. 그래서 청소년 소설에서는 떠남과 돌아옴의 과정을 통해 성장하고 성숙하는 주인공들이 단골 주인공이다. 익숙한 곳을 떠나 우여곡절을 겪고 돌아온 주인공은 전과 같지 않다. 같을 수 없다. 낯선 곳에서 주인공은 끝없이 시련을 경험하고 새로운 도전을 해야 하니까.


성장과 성숙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각각 ’사람이나 동식물 따위가 자라서 점점 커짐‘과 ‘몸과 마음이 자라서 어른스럽게 됨’이라고 나온다. 결국 두 단어 모두 ‘자람’이라는 동사를 품고 있다. 몸이 자라든, 마음이 자라든, 전보다는 조금 더 큰 사람이 된다는 의미.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된다는 의미.


몇 개월짜리 여행도 아니고 해외여행도 아니지만, 겨우 제주에서 한 달 살기만으로도 아이들은 자라고 있다. 몸도 마음도 성장하고 성숙하는 중이다. 어른도 쉽지 않은 일을 매일 하고 있고(일기 쓰기), 익숙한 곳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하던 일을 해냈다(잠자리 독립). 좋아하는 것만 하려던 마음을 내려놓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있다. 편안하고 익숙한 공간을 찾는 대신 새로운 공간에 적응하고 이곳에서의 재미를 발견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의 몸과 마음은 어떤가. 어제 글에도 언급했지만, 나도 서서히 자라고 있는 것 같다.(내가 나에 대해 내리는 판단은 철저히 주관적이므로 추측형의 ‘~것 같다’를 쓴다.) <여행의 이유>(김영하)에는 여행을 떠나는 마음에 관해 ‘풀리지 않는 삶의 난제들과 맞서기도 해야겠지만, 가끔은 달아나는 것도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말이 나온다. 여행을 준비하며 되뇌던 문장이다. 이 여행을 떠나기 전 나는 생의 가장 무거운 난제를 지고 있었다. 물론 지금도 그 난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해결하지 않고 달아났으니 당연한 일이다.


난제에서 멀어져 보니 조금은 다른 것이 보인다. 그것이 결코 답은 아니다. 여전히 답은 오리무중이고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그럴 것을 안다. 다만 아주 조금 자라난 내가 보인다. 다시금 난제와 마주 설 용기를 내는 나. 달아난 곳으로 뚜벅뚜벅 되돌아갈 마음을 먹는 나. 그렇게 전보다는 조금 성장하고 성숙한 나. 여행은 정말 성장이고 성숙인가 보다.


그나저나 여행이 성장이고 성숙인 것은 참 좋은데, 실제 몸이 자꾸만 성장하듯 불어나는 것은 좀 별로다. 매일 하던 운동을 그만큼 하지 못하고 여행이라는 핑계로 평소 잘 먹지 않던 것들을 자꾸 먹게 되는 이 악순환. 확실한 것은 여행에서 돌아가면 몸도 마음도 전보다 꽤 자라 있겠다는 것이다. 몸은 쩝, 그만 자라면 좋겠네.



매거진의 이전글 [7일 차] 나는 내 인생에 넓은 여백이 있기를 원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