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네와 함께 하는 제주 여행 이틀차. 이제껏 한 번도 아프지 않고 긴 여행을 잘 버텨주던 첫째가 탈이 났다. 하필 방문객이 있는 날에. 설상가상으로 2주 동안 혼자 아이들을 돌보느라 몸도 마음도 쉴 틈이 없던 나도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일단 병원을 가야겠는데, 제주에 처음 온 동생네까지 병원행을 하게 할 수는 없었다. 우리가 함께 하지 못하더라도 동생과 조카만은 제주의 근사한 무언가를 즐기도록 하고 싶었다.
둘을 보낼 만한 곳을 생각하다 아쿠아플라넷을 떠올렸다. 이번 여행에서는 방문하지 않았지만 작년과 재작년에 모두 방문했을 때 좋은 추억을 남긴 곳이었다. 동생과 조카를 아쿠아플라넷까지 태워다 주고 우리는 그 근처 병원에 다녀와서 휴식을 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제주 집이 있는 함덕에서 아쿠아플라넷이 있는 성산까지는 40분 정도가 걸렸다. 세 아이와 동생까지, 넷을 태우고 사십 분을 달려 성산에 있는 병원에 도착했다. 아이들의 진료를 보고 다시 아쿠아플라넷으로 가려는데, 조카의 컨디션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쓸데없이 길바닥에 시간만 잔뜩 버린 채 피곤한 몸을 이끌고 다시 제주 집으로 돌아왔다. 혼자 두 시간 가까이 운전을 한 데다 전날 밤에 깊은 잠을 자지 못한 나는 녹초가 되었다. 비행기를 타고 오자마자 아이들의 물놀이를 쫓아다닌 것도 모자라 언니의 말동무가 되어주느라 잠이 부족하긴 마찬가지였을 동생도 뻗어버렸다. 오히려 세 아이는 집에 오니 에너지가 충전되었는지 셋이서 다시 신나게 놀기 시작했다. 동생이 잠깐 쉬는 동안 나는 아이들을 지켜보다 식탁에 엎드려 깜빡 잠이 들었다. 악몽을 꿨던 것 같은데, 깨고 나니 두려웠던 느낌 외에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맥락 없는 악몽은 실로 오랜만이라, ‘피곤하긴 정말 피곤하구나.’ 싶었다.
동생네와 오랜만에 만나기도 했지만 심지어 제주에서 만났는데 이대로 하루를 마무리할 수는 없었다. 아이들의 체력이 좀 회복된 것 같고, 한숨 자고 온 동생도 좀 살아난 것 같아서 함덕 바다에 있는 잠수함을 타러 가자고 했다.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지만 그래도 오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있으니까. 잠수함이라기에는 너무 소박한 작은 배였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좋아하니 기뻤다. 그렇게 많은 물고기는 나도 처음이라 신기하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작은 기념품 가게에 들렀다. 여행은 기념품이지. 무용한 것들을 소비하는 데 죄책감이 덜한 것은 여행이 주는 기쁨 중 하나다(라고 생각한다). 기념품 가게에는 그야말로 무용하고 예쁜 것들이 가득하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노트나 펜은 쓸데가 충분하다고, 장신구나 먹을거리도 그러하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사실 비용 대비 실용성은 현저히 떨어지는 것들이다. 소위 가성비가 없는 것들. 대신 가심비가 좋은 것들.
기념품 가게에 들어가기 전에 아이들과 약속을 했다. “기념품 가게에서 꼭 사고 싶은 거 딱 하나만 사는 거야. 나중에 여행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그 물건을 보면서 ‘우리 함덕 바다에서 이모랑 같이 잠수함도 타고 이것도 샀지!‘하며 여행을 추억할 수 있는 거, 딱 한 가지만!” 아이들은 손가락 걸고 약속을 했다. 하지만 막상 기념품 가게에 들어가자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엄마, 이것도 사면 안 돼?”, “하나만 더 사주면 안 돼?”라며 조르기 시작했다.
“응, 안 돼. 원하는 걸 모두 다 가질 수는 없어. 갖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알겠지만, 여러 가지가 다 갖고 싶다면 하나를 선택하는 용기도 필요한 거야.”
시무룩한 표정이던 아이들은 금세 진지한 얼굴로 가장 원하는 것 하나를 고르기 위해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몇 가지 물건을 보고 또 보고, 고민을 거듭하더니 각자가 원하는 것 하나를 골라왔다. 기분 좋게 계산을 하고 늦은 저녁을 먹은 후 집으로 돌아와서 함께 하는 여행의 두 번째 밤이자, 제주 살이의 열네 번째 밤을 마무리했다.
어젯밤 아이들과 함께 잠들어버린 탓에, 하루 늦은 기록을 한다. 열네 번째 날, 여행을 통해 발견한 문장은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질 수는 없다’이다. 원하는 일정이 있었으나, 아이들이 아팠던 바람에 원했던 모든 것을 할 수 없었던 하루. 기념품 가게에 가서도 모든 것을 사주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원하는 것 하나를 고르게 하며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음을 알려주고 싶었던 하루.
원하는 것은 모두 가질 수 있다고 믿던 때도 있었다. 애쓰고 마음을 기울이면 모두 다 가질 수 있다고, 다 얻을 수 있다고. 그래서 조급하던 때도 많았다. 애쓰고 마음을 기울였는데 다 가질 수 없을 때, 다 얻을 수 없을 때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그것에만 마음을 옭아매던 때가. 고백하자면 지금도 아주 가끔은 그렇다. 그래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원한다고 다 내 것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주 서서히’ 깨닫고 있다. (너무 서서히라 문제가 좀 있긴 하다만.) 어떤 것은 아무리 간절히 원해도 절대 가질 수 없고 얻을 수 없다. 무언가를 얻는다는 건, 무언가를 포기한다는 말과 동의어다. 결코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으니까. 언제쯤 이 사실 앞에서 완벽히 의연해질 수 있을지.
인생의 여행 중에 만나는 기념품 가게에도 갖고 싶은 것들은 차고 넘친다. 마음을 홀릴 만한 아름다운 것들이.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그중에서 내 마음을 가장 사로잡는 한 가지를 가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물론 그 한 가지는 금세 질릴 테고, 책장이나 선반 위에서 먼지 쌓인 채로 낡아갈지도 모른다. ‘그때 이거 말고 다른 걸 살 걸. 생각해 보니 그게 더 예뻤던 것 같은데.’라며 후회하는 마음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질 수 없을 때, 내가 선택한 단 한 가지가 그것이었다면 분명히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 순간의 선택에서 느꼈던 기쁨과 만족을 잊지 않기로 한다.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지만, 가진 것을 오래도록 추억하며 아낄 수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