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네가 오후에 제주를 떠나는 일정이라 공항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며칠 전에 방문했던 국립 제주 박물관이 마침 공항과 멀지 않았다. 조카도 좋아할 것 같아서 한 번 더 가보기로 했다. 우리 집 두 아이는 한 번 가봤다고 자기들이 가이드가 되어 조카를 여기저기 데리고 다녔다. 박물관 투어를 즐기고 근처에서 점심을 먹은 후 동생네를 공항에 내려주었다. 만남이 반가운 만큼 이별은 아쉬웠다. 겨우 이박삼일 같이 있었다고 돌아오는 차 안이 어찌나 적막하던지.
집에 오기 전에 다이소에 들러 아이들이 일기장으로 쓰는 스케치북을 몇 권 더 사고, 베이커리 카페에 들러 빵도 샀다. 거의 매일 도장 찍듯 들리는 하나로마트에서 저녁 장도 보았다. 양손 무겁게 집에 돌아와서 아이들은 다이소에서 사 온 블록 만들기 키트를 하고, 나는 못다 쓴 어제의 문장을 마저 썼다. 소박한 저녁을 해 먹고 잠자리 독서로 <긴긴밤>을 읽은 후, 아이들은 잠자리에 들었고 나는 식탁에 앉아 오늘의 글을 쓴다. 별다를 것 없는 하루가 무사히 저물어간다.
여행의 절반이 흘렀다. 이제 제법 이 동네에 익숙해져서 내비게이션 없이 다이소도 가고 도서관도 가고 마트도 가고 빵집도 간다. 아쉬운 점은 숙소가 산길에 접해있어 도보로 이동가능한 곳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마을 산책길 정도가 다인데, 아직 날씨가 많이 덥기도 한 데다 바다가 보이는 길이 아니라 그런지 자주 걷게 되진 않는다. 도보로 다닐 만한 카페나 마트, 편의점 등이 있었다면 2주 만에 단골이 되었을 텐데.
오늘 저녁때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의 여행이 이제 절반을 지나고 있다고 했더니 첫째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엄마, 재밌게 보내는 날은 시간이 엄청 빨리 지나가는데, 재미없는 날은 시간이 엄청 늦게 가는 것 같아.“ 와, 정말 놀랐다. 그런 걸 벌써 느끼고 표현한다고? 우리는 함께 남은 여행의 날짜를 세며, 남은 날들도 아쉬움이 잔뜩 남도록 재밌게 보내보자고 다짐했다.
아이와의 대화를 곱씹으며 오늘 발견한 문장을 쓴다. ‘시간의 흐름은 상대적이다.‘ 시간의 흐름을 절대적으로 생각하면 분명 일 년은 열두 달 365일, 하루는 24시간, 한 시간은 60분, 1분은 60초. 딱 떨어지게 같다. 그렇지만 우리가 느끼는 시간의 흐름은 매일, 매년이 결코 같지 않다. 나이만큼의 속도로 시간이 흐른다는 말도 있으니까. 십 대의 시간과 사십 대의 시간은 확실히 다르게 흘러간다.
십 대 때는 하루하루가 참 길게 느껴진 날들이 많았다. 일 년도 어찌나 긴지. 아무리 학교를 다녀도 다녀도 여전히 나는 학생이고, 청소년이고, 미성년자였다. 도대체 언제 어른이 될지도 까마득한데, 계속해서 어른이 된 후에 무엇이 될지 꿈꿔야 하고 그 꿈을 위해 노력해야 했으니. 하루하루를 온전히 누리고 즐기기보다는 아득한 미래의 어떤 순간을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흘려보냈던 것 같다. 그마저도 매일이 비슷한 일상의 반복이라, 십 대의 시간은 그저 끝을 알 수 없이 뻗어가는 강물처럼 천천히 흘러갔다.
이십 대가 되면서부터는 시간이 조금 빠르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 4년은 12년의 학창 시절에 비해 너무도 짧았고, 그 시간은 코앞에 들이닥친 어른으로서의 미래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 애써야 했다. 그만큼 실패를 경험할 일도 많았고 그로써 감당해야 하는 좌절의 순간도 많았다. 한편으로는 십 대 때와 달리 무한히 주어지는 자유 덕에, 이전까지 누리지 못한 즐거움을 만끽하는 순간도 많았다. 좌절과 즐거움이 여울목처럼 굽이굽이 이어졌으니, 확실히 잔잔한 강물의 흐름 같던 십 대의 시간보다 이십 대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삼십 대는 이십 대와 비할 수 없었다. 인생의 큰 결정을 수시로 내려야 했고, 내가 한 결정들에 대한 책임도 무거워졌다. 그만큼 많은 일들을 해내야 했고 많은 마음을 감당해야 했다. 그것은 때론 큰 성취감과 기쁨이었지만 때론 큰 부담감과 슬픔이기도 했다. 이십 대의 시간이 굽이치는 강이었다면 삼십 대의 시간은 바다로 떨어지는 폭포수 같았다.
막 사십 대가 된 지금. 아직 사십 대의 시간은 가늠할 수 없다. 다만 지금까지의 흐름으로 보았을 때 사십 대는 훨씬 더 빠른 속도로 흘러갈 것이다. 오십 대도, 육십 대도. 그렇게 나이를 먹어갈수록 상대적인 시간은 속도를 더해갈 것이다.
아이가 던진 말로 돌아가본다. ‘재밌게 보내는 시간은 빨리 흘러가고, 재미없게 보내는 시간은 천천히 흘러간다.‘ 8살 아이에게도 어떤 날은 시간이 빠르고, 어떤 날은 느리다. 시간의 상대적인 흐름은 비단 나이를 먹어가는 것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닌가 보다. 그렇다면 어차피 사십 대의 속도로 흘러갈 시간을 아쉬움 없이 좀 더 재밌게 보내보고 싶다. 하루하루가 더 빨리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그래서 금방 나이 먹는 것 같은 기분에 쓸쓸해질지라도. 너무 지루하고 재미가 없어서 매일매일이 더디게 흘러가는 사십 대보다는 훨씬 좋을 것 같다.
그나저나, 내일도 쏜살처럼 느껴질 만큼 재미난 하루를 보내야겠다. 아이들과 나의 삶에 이 여행이 찰나처럼 기억되도록, 너무 빨리 지나가버린 것 같아 아쉬워질지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