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부터 제주의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새벽에 산간지방으로 호우경보가 내렸다는 재난문자가 왔고, 아침에는 해안가로 풍랑주의보가 내렸다는 문자까지 왔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아침을 맞이했다. 창문을 열어 날씨부터 확인했다. 제주도 특유의 습도 높은 바람이 훅 끼쳐왔다. 그런데 어쩐지 어제까지의 바람과는 온도가 미세하게 달라진 듯했다. 큰비가 온다고 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이번 주말이면 9월이 시작되니 바람결이 달라질 때도 되었다 싶었다
아이들과 하루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푹 쉬고 싶었지만, 며칠 전부터 아쿠아리움에 가자고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의 성화가 오늘따라 대단했다. 며칠째 잠을 잘 자지 못했고, 여러 이유로 몸의 컨디션도 회복되지 않아서 선뜻 마음이 나지 않았다. 아쿠아리움 자체도 힘든 여정이겠지만 거리도 꽤 먼 데다 날씨까지 좋지 않으니 왕복 두 시간의 운전도 각오해야 할 것이었다.
‘오늘은 내 마음에 맞춰 그냥 쉬자고 설득을 할까, 내키지 않지만 아이들의 마음을 따라 몸을 움직여볼까.‘
아침을 준비해서 먹는 한 시간가량, 머릿속에 두 가지 시나리오가 번갈아 펼쳐졌다. 내 마음에 따랐을 때의 오늘 하루와 아이들의 마음을 따랐을 때의 오늘 하루가. (80년대 생이라면 알만한 프로그램, ‘인생극장’처럼!) 내 마음에 따르면 아이들을 설득하는 시간 동안은 무척 애를 써야겠지만 종일 몸은 좀 편할 것 같았다. 아이들은 집에서도, 집 마당에 나가서도 하루종일 잘 노니까. 잠깐의 아쉬움만 잘 달래고 나면 괜찮을 듯했다. 아이들의 마음에 따르면 아침부터 신이 난 아이들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었다. 내 몸은 천근만근이겠지만, 들뜬 아이들과 함께 하는 하루는 여행의 즐거움을 배가시킬 것 같았다. 뭐, 사실 이쯤 되니 더 고민할 여지가 없었다.
“우리 아쿠아리움 가자!”
아이들과 함께 간 세 번째 아쿠아플라넷이었다. 같은 장소를 세 번씩이나 방문하다니. 심지어 나는 해양 생물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데 엄마라는 이유로 아이들의 기쁨에 함께 한 거였다. 사실 이전 두 번은 그저 그랬다. 그런데 참 희한한 한 일이었다. 이번에는 아이들과 함께 보는 모든 생물들이 신기하게 보였다. 몇 번째 와보는 곳인데 왜 새삼 새롭게 보였는지 모르겠다. 이 여행에 큰 의미를 두고 있어서 그랬을까.
오전 열한 시부터 오후 다섯 시까지 잠깐의 휴식 시간도 없이 아쿠아리움의 전층을 몇 번이나 오갔는지 모른다. 모든 생물을 꼼꼼히 보고 또 보았다. 어떤 생물은 몇 번을 오갈 때도 안 보이더니 마지막에 갑자기 나타나 우리를 놀라게도 했다. 아쿠아리움에서 진행하는 공연도 모두 챙겨보고, 체험 프로그램도 다 참여해 보았다.
몸의 컨디션이 이미 좋지 않은 상태로 간 데다 너무 많이 걷고 뛰었더니, 마음과 달리 몸은 점점 천근만근이 되었다. 나중에는 발이 부어서 신고 간 운동화가 꽉 끼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는 못 걷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아이들에게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말했다. “얘들아, 엄마 지금 너무 힘든데? 집에 가면 진짜 뻗겠다!” 그랬더니 첫째 아이의 한 마디.
“엄마! 오늘 커피를 못 마셔서 그래! 빨리 커피 사러 가자!”
여행 보름 만에 엄마의 컨디션을 끌어올리는 카페인 파워를 알게 된 아들 덕에 아쿠아리움에서 나오는 길에 진한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카페인 파워 충전으로 저녁 시간도 잘해 먹고, 잘 떠들고, 잘 보냈다. 그리고 오늘도 아이들은 각자의 애착 베개를 꼭 끌어안은 채 잠이 들었다.
좋지 않은 몸으로 종일 아이들의 무거운 짐을 양쪽 어깨에 진 채 걷고 또 걸었더니, 지금도 다리가 무겁고 어깨가 뻐근하다. 그럼에도 꽤 근사했다 말하고 싶은 하루를 무사히 마무리하며, 오늘의 문장을 쓴다. ‘마음과 다른 일에서도 기쁨을 얻을 수 있다.‘ 내키지 않는 마음을 겨우 내었던 하루, 내 마음과 다른 길로 발길을 돌려 종일 몸을 움직였던 하루. 그런 하루의 끝이 근사할 수도 있구나.
마음과 몸이 함께 움직이는 일에서 기쁨을 느끼는 건 쉽다. 마음이 가는 방향으로 몸은 수월하게 움직이니 에너지도 덜 쓰인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쪽으로 몸을 움직이는 일은 그 자체로 이미 피로한 일이다. 에너지도 몇 배로 써야 한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도 마음이 내키는 일에만 에너지를 쏟으며 살고 싶었다. 마음이 움직이는 일이 아니면 선뜻 몸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그건 바람일 뿐, 실제 삶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일이나 성과에서도 요지부동인 마음을 애써 내어 몸을 움직여야 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럴 때면 마음이 내지 못하는 에너지를 몸에서라도 내어야 했다. 쉽게 아프고 금방 지쳤다.
엄마가 되고 난 후로 마음이 나지 않는 일에도 애써 마음을 내어놓는 일이 잦다. 두 아이는 나를 뿌리 삼아 자라나지만, 나와는 완벽히 다른 나무로 자라나는 중이다. 그러니 나와 같은 마음일 리 없다. 두 아이의 마음을 읽다 보면 내 마음은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춘다. 내 마음이 나설 자리에 내 몸이 먼저 나서서 아이들의 마음을 받아내고 있다. 어떤 날은 그게 서글프고 힘에 부치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들의 마음을 받아 움직이는 일은 기쁨으로 돌아올 때가 더 많다. 아이들을 쫓아다니다 이제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발견했을 때, 신나게 노는 아이들의 얼굴에 활짝 피어난 미소를 보았을 때, 아이들이 나와 함께 하루를 잘 보내고 편안히 잠든 모습을 보았을 때. 그럴 때면 내 마음과 다른 날이었어도 끝내는 기쁜 마음으로 마무리하게 된다.
엄마라는 역할이 아닌, 또 다른 역할을 해내야 하는 순간에도 가끔은 마음과 다른 일에 몸을 먼저 움직일 용기를 내고 싶다. 쉽지 않을 것이고, 금세 피로해질 것이다. 그래도 가끔은 그래보고 싶다. 그러다 보면 예기치 않은 기쁨을 마주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느끼는 기쁨은 마음이 먼저 움직인 일에서 얻은 기쁨과 다른 차원의 것일 테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잘 보냈다. 감사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