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친구들에게서 태풍이 온다는데 괜찮냐는 문자가 왔다. 제주에 있는 보름 동안 벌써 두 번째 받는 내용의 문자였다. 태풍이 온다는데 여기 날씨는 맑다 못해 쾌청했다. 이곳의 날씨는 너무 좋다는 답장을 보내며, 오늘 이 날씨를 어떻게 만끽할까 고민했다. 어제 아쿠아리움에서 무리했던 탓인지 아이들도 아침에는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간단히 아침을 해 먹고 아이들이 클레이 놀이를 하는 동안 집의 창문을 모두 열고 식탁에 앉아 책을 읽었다. 바람이 너무 좋아서 책을 읽다 말고 가만히 바람을 맞았다. 이런 여유를 얼마 만에 누려보는 걸까.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서야 아이들과 집을 나섰다. 하늘을 배경으로 사진도 한 장씩 찍고, 집 근처 도서관에 들러 책도 새로 빌렸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아이들도 나도 괜히 마음이 들떴다. 마음 같아서는 물놀이를 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아직 내 컨디션이 온전하지 않았다. 괜히 더 무리했다가 내가 더 아파버리면 여행을 지속하기 어려울 것 같아 물놀이는 깔끔하게 포기했다.
“얘들아, 우리 서우봉 올라가볼까?”
“서우봉이 어딘데?”
“우리 매일 놀던 함덕 바닷가 있지? 바다에서 보이던 언덕 기억나? 거기가 서우봉이야.”
“응, 기억나! 가보자!”
언젠가는 한라산에 오르고 싶다는 아이들과 집 근처 서우봉부터 올라보기로 했다. (아직 서우봉도 모르면서 한라산이라니. 욕심이 과한 아이들일세…) 아쿠아리움을 여섯 시간 동안 돌아다니는 건 문제가 없었지만, 낮은 언덕이라도 언덕을 오르는 것은 아이들에게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특히 겨우 여섯 살인 둘째에게는 꽤 큰 미션일 듯했다. 아쿠아리움처럼 새롭고 신기한 볼거리가 가득한 곳도 아니고, 그저 자연을 느끼며 걸어야 하는 길이니. 물론 나에게는 아쿠아리움보다 백 배, 천 배 매력적인 곳이겠지만.
아이들과 으쌰으쌰 마음을 다지고, 텀블러 세 개에 시원한 물을 가득 채워 서우봉으로 걸어갔다. 함덕 해수욕장 주차장에서부터 서우봉에 오르는 올레길 입구까지도 꽤 걸어야 했다. 그래도 올레길은 길이 잘 되어 있어서 걷기에 참 좋았다. 날씨도 좋고, 길도 아름답고, 아이들의 의지도 불끈이라 걷는 데 힘들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완벽한 바람을 맞으며, 푸르른 수풀로 가득한 서우봉을 올랐다. 아이들은 걷다가 뛰고, 뛰다가 멈추고, 멈추었다 다시 걸으며 씩씩하게 잘 나아갔다. 나는 아이들의 뒤를 따르며 연신 사진을 찍었다. 아이들과 서우봉, 제주의 하늘과 함덕의 바다가 각각 주인공이 되기도 배경이 되기도 했다. 어디를 어떻게 찍어도 그림 같았다.
“엄마, 오늘 바람이 진짜 시원해서 다행이다. 지난 주였으면 못 걸었을 것 같아! “
“그러게. 오늘 바람이 우리를 도와줬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카페에 들러 디저트와 음료도 먹고 마트에 들러 저녁때 먹을 고기도 샀다. 저녁을 챙겨 먹은 후 오늘 하루를 각자의 방식으로 기록하고 하루를 마무리했다.
제주에서의 열여섯 번째 밤이 저물어간다. 식탁에 앉아 글을 쓰는데, 부쩍 귀뚜라미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매미 소리로 가득하던 밤이었는데. 소리만 그런 게 아니다. 바람의 결도, 새벽녘의 공기도 달라졌다. 차갑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선선하다는 말 정도는 충분히 써도 될 만큼. 이렇게 한 계절이 지나고 있다.
청각과 촉각으로 계절의 변화를 고스란히 느낀 하루, 오늘의 문장을 쓴다. ‘여름이 지나가야 가을이 온다.’ 유난히도 긴 여름이었다.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폭염이 이어졌고, 비도 한 번 오기 시작하면 얼마나 많이 오던지 걸핏하면 호우주의보로 도로가 통제되기 일쑤였다. 동남아처럼 맑은 하늘에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는 일도 잦았고, 열대야는 기록을 경신하기에 이르렀다.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길고 긴 여름이었다.
‘이 더위가 언제 끝날까, 이 여름이 지나가긴 갈까.’ 하던 것이 무색하게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아직 가을이 오고 있다는 말은 섣부르지만, 분명 저 멀리서 가을이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다. 보름 후면 추석이고, 추석을 지나고 나면 이내 ’ 가을이 왔구나‘ 싶은 날들이 이어질 것이다.
여름이 지나간다. 폭염과 폭우로 쉽지 않던 여름이 무사히 지나가고 있다. 여름이 지나가면 자연스럽게, 그리고 반드시 가을이 올 것이다. 폭염과 폭우를 무사히 견딘 열매는 더욱 다디달 것이고, 나무의 뿌리는 더 깊어졌을 것이다.
결코 지나가지 않을 것 같은 일들도 시간이 흐르면 모두 지나간다. 너무 덥다고, 너무 지친다고, 도대체 언제쯤 모두 지나가는 거냐고 아무리 푸념하고 투정 부려봤자, 때가 이르면 아무것도 지나가지 않는다. 시간이 필요한 일에는 시간을 견디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꼭 필요한 만큼의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 시간을 무사히 견뎌내고 나면 반드시 다음 계절이 온다. 한여름 햇볕을 잘 버틴 후 맞이하는 초가을 바람은, 그게 아무리 약한 바람일지라도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아, 드디어 지나갔구나.’ 싶은 날은 끝내 오고야 만다. 그러니 어차피 시간이 필요한 일이라면 ‘지친다, 버겁다’ 푸념하며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소거해버리고 싶지 않다. 매일매일을 어떤 식으로든 잘 살아내고 싶다. 지나가는 계절을 잘 보내주고 싶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그 여름의 무더위와 장마를 잘 살아냈다고, 그리하여 무사히 선선한 계절에 도착했다고 스스로를 대견해하고 싶다.
여름이 지나가야 가을이 온다. 그리 머지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