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선생님, 이제는 '스승'이 되고 싶다.

by 진아

지금은 아이를 키우느라 휴직 중에 있지만, 나는 고등학교 교사다. 사실 학창 시절에 교사가 되고 싶다고 간절히 희망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고 보면 그맘때 나는 교사가 아니더라도 특별히 어떤 일에 대한 대단한 열망이 있었던 소녀는 아니었다. 이 일 저 일 기웃거리긴 했지만, 실상은 하루하루 학교생활을 해나가기도 벅차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러다 고3이 되어 대학입시를 맞닥뜨렸을 때 느낀 당혹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내신 성적으로 수시를 준비하며, 집안 형편이 어려우니 국립대를 가긴 가야 하는데 좋은 과에 진학하기에는 성적이 부족했다. 담임 선생님은 그나마도 국립대 안에서 사범대에 속해있던 유아교육과를 추천하셨고, 평소에 아이들을 좋아하던 나는 별 고민도 없이 선생님의 뜻에 따라 원서를 접수했다. 면접까지 봤던 기억이 있는데, 면접을 꽤 잘 봤다고 자부했으나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평소 생각해본 학과도 아니었는데, 불합격 통보를 받으니 무척이나 초조해졌었다.


다행히 그 해에 수능을 잘 보았고, 수시에서 떨어진 국립대에 정시 원서를 넣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안정적인 직장을 선택하려면 사범대가 제일 적당한데, 사범대 국어교육과를 가기엔 성적이 부족했다. 학창 시절에 유일하게 잘했고 좋아했던 과목이 국어였기에 그나마도 국어교육과를 고민했던 것이지 꼭 사범대에 가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성적이 되더라고 사회교육과는 죽어도 공부할 자신이 없어서 그냥 국문과를 가겠다고 했다. 국어 선생님이셨던 고3 담임선생님은 국문과 나와서는 굶어 죽는다며 극구 반대를 하셨지만, 무슨 배짱이었던지 끝내 국문과에 원서를 넣었고 합격 통보를 받았다.


대학에 가서 국어국문학 공부에 푹 빠져버렸다. 고전문학, 현대문학에 대한 이론적인 공부들과 문학 사상, 작가론 등을 공부하면서 내가 국어국문학이라는 전공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4학년이 되어서 진로를 선택해야 할 때가 되자, 대학원에 진학하여 국문학 공부를 좀 더 이어가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


평소에 아주 좋아했던 지도교수님을 찾아갔다. 진로에 대한 고민을 말씀드리고 싶다고 했더니, 교수님은 흔쾌히 시간을 내어주시며 따뜻한 차를 한 잔 내어주셨다. 차 한 잔을 앞에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교수님의 질문에 본격적인 진로 얘기를 하게 되었다.


진아야, 그래 너는 졸업하고 뭐 할 계획이니?”

“교수님, 저 사실 대학원 석사과정에 진학하고 싶습니다.”

“우리 과 말이니?”

“네.”

진아야, 내 말 잘 들어라. 너 대학원 가면 최소한 30대 후반까지는 밥벌이가 힘들다. 집에서 너를 물질적으로 지원해줄 수 있는 여력이 되니?”

“아니요... 저는 빨리 자립도 해야 해요.”

“우리 과 조교 중에 000 선생 알지? 그 선생 나이가 올해 38살이다. 그나마도 조교를 하고 있긴 하지만, 조교 생활하느라 아직 박사 논문도 못 썼어. 조교 계약 끝나면 당장 수입도 없어.”

“.... 그래도 저는 국문학 공부를 계속하고 싶은데요.”

“길은 여러 가지다. 교육대학원은 생각해봤니? 우리 대학원 석사과정 중에 △△△ 선생 알지? 그 선생은 000 선생이랑 같은 학번이고 이제 석사과정인데도 교사라는 본업이 있다 보니 000 선생이랑 태도 자체가 달라. 부지런하고 열심히 하지만 당당해. 아쉬운 게 없거든.”

“... 교수님 말씀은 제가 교육대학원에 가서 교사가 된 이후에라도 국문학 공부는 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래, 솔직히 말하면 우리 대학원 오는 제자들 모두 밥벌이도 힘들어서 선뜻 권하긴 어렵구나.”



벌써 14년 전의 대화라, 구체적인 어휘나 토씨들은 조금 틀리겠지만 대화의 맥락과 내용은 거의 99% 이상 일치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그날의 대화가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교수님이 어떤 마음에서 나에게 조교샘들의 실명까지 거론하시면서 솔직한 조언을 하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교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현실을 직시하게 된 것만은 분명했다.




우리 집에서 누구도 대학 이후의 내 삶에 경제적 기반이 되어줄 사람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등록금은 장학금으로 충당했고, 용돈은 과외와 학원 아르바이트를 통해서 해결했다. 중간중간 엄마에게 도움을 받을 때도 있긴 했지만, 대학 생활 내내 가능한 한 집에는 손을 벌리지 않는 삶을 살고자 노력했었다. 대학원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는 나름대로 핑크빛 미래를 꿈꿨었다. 힘들겠지만,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서 학비와 용돈을 충당하는 것은 대학 때랑 그렇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집에 아무런 도움을 드리지 못하는 것이 죄송하긴 했어도 원하는 공부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교수님에게서 너무나 적나라한 조언을 듣고 보니, 덜컥 겁이 났다. 최소 30대 후반까지도 안정된 벌이 없이 내가 그리고 엄마가 그 생활을 버틸 수 있을지, 현실을 직시하자 아찔해졌다.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구나. 너무 이기적이었어.’


그날 이후 다른 마음을 다 접고, 교육대학원 준비에 몰두했다. 같은 학교에 있는 교육대학원에 진학하려니 경쟁률이 만만치 않아서 꽤 긴장하며 공부를 했는데 다행히도 합격을 했다. 그렇게 2년 6개월 동안 학과 사무실 조교, 과외, 학원 아르바이트, 대학 내 연구소 조교 일 등을 병행하며 석사 학위와 함께 교원자격증을 받았다. 하지만 그 해 말에 도전한 첫 번째 임용시험에서는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이듬해 나는 정말 죽어라고 공부에 매달렸다. 대학 기숙사에 살면서 매일 10시간씩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공부를 했다. 지금이라면 절대 못할 것 같은 그 공부를, 그대는 정말로 절박한 마음으로 했다. 나이는 이미 이십 대 후반을 향해 달려가고, 여전히 엄마의 삶은 곤궁했다. 그쯤 되자, 내가 교사가 하고 싶은 건지 안정적인 수입이 있는 일을 하고 싶은 건지 그 경계조차 모호해졌다. 그저 어떻게든 그해에 합격을 해야 한다는 엄청난 압박감에 시달렸던 것 같다. 이제 와 고백하자면 그때 나는 심각한 불면증으로 수면에 도움이 된다는 영양보조제를 매일같이 챙겨 먹었다. 그럼에도 쉽게 잠들지 못하는 밤들이 이어졌고, 잠이 들어도 새나 벌레가 나를 공격하는 공포스러운 꿈을 꾸며 깨기 일쑤였다.


나의 노력을 하늘이 알았던 것인지, 엄마의 간절한 기도가 통한 것인지, 감사하게도 그해 임용시험에서 합격 통보를 받았다. 합격자 조회에서 ‘합격’이라는 두 글자를 본 순간의 희열과 안도와 행복과 기쁨이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내 안에서 벅차오른다. 소식을 들은 엄마와 할머니, 할아버지가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동생은 나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했었는지도 아직까지 생생하다. 그만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큰 기쁨이었다. 그때 나는 ‘더 이상 내 인생에 큰 이벤트는 없겠구나, 더 이상은 돈 걱정 따위 하지 않고 평생 살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교사로서의 사명감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진짜 시작은 합격 이후부터였다. 그저 안정적인 직업을 찾아 교사가 된 나였다. 다만 어렸을 때부터 좋은 선생님들을 많이 만났기에 교사라는 직업 자체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고, 나도 그런 좋은 선생님이 되어야겠다는 어설픈 다짐이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현장은 달랐다.


첫 발령으로 만난 중학생 아이들은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산만했고, 예의가 없었다. 아이들은 젊은 여자 선생님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를 좋아해 주었으나, 그것은 나라는 사람 개인에 대한 관심이었을 뿐 결코 수업이나 생활지도로 이어지지 않았다. 나는 아이들에게 사랑받는 교사였으나, 스스로는 매일 자괴감과 싸우는 사회생활 초년생일 뿐이었다.


그렇게 1년, 2년, 시간이 흐르고 3년 차쯤 되자 내가 가야 할 길이 조금씩 보였다. 교사로서의 나의 장점은 아이들의 이야기를 편견 없이 들을 수 있는 마음 자세였다. 아이들은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내며 많이도 울었고, 그렇게 울고 난 아이들은 그저 젊은 여자 선생님이라서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선배로 여기며 믿고 따라주었다. 나는 그런 아이들이 마냥 예뻐 보이기 시작했고, 그 무섭다는 중2들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아이들과 사랑을 주고받으니 수업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혼자 떠드는 수업이 아니라 함께 배워가는 수업을 하고 싶어 졌다. 그맘때쯤부터 아이들에게 “샘도 잘 모르겠어.”라는 말을 부끄럽지 않게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모르는 건 같이 찾아볼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교사로서 권위를 세우려 하지 않으니 오히려 권위가 서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고등학교로 발령을 받았고,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만났다. 그냥 밥벌이의 수단으로 선택했던 교사라는 직업이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이 되었다. 매시간 수업 활동을 새롭게 구성했으며, 그 내용을 구조화하여 활동지의 형태로 만들었다. 중학생들과 다르게 고등학생들은 수능이라는 장벽 앞에 강의수업을 하지 않는 내 수업을 힘들어했다. 하지만 나는 버텼다. 아이들의 인생에서 수능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해주고 싶었다. 아이들의 저항을 온몸으로 받으며 끝내 강의를 하지 않고 1년 내내 아이들의 활동이 중심이 되는 수업을 했다. 그랬더니 아이들에게서부터 반응이 왔다.


“샘 수업이 제일 기억에 남아요.”

“샘 수업이 제일 재밌어요. ”

“샘이랑 수업하면 잠이 안 와요.”

“우리 반 애들이 제일 열심히 하는 수업이 샘 수업일걸요?”



어깨춤이 절로 나왔다. 버겁고 힘들었지만, 괴롭지는 않았다. 그렇게 수업을 하면서 아이들과 진짜 눈맞춤을 할 수 있었고, 평소 수업에 참여하지 않던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수업에서 아이들이 나를 신뢰하기 시작하자 아이들과의 관계는 더 좋아졌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았고,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행복했다.


나는 더 이상 직업인으로서의 교사가 아니라, 진짜 ‘선생님’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침나절부터 카톡이 울렸고 메일이 왔다. 스승의 날이라고 연락했다는 아이들의 메시지를 보며, ‘아, 내가 선생님이었지.’ 싶었다. 지난 3년 3개월간 두 아이의 엄마로 살며, 선생님이었다는 사실을 자주 잊었다. 그래도 일 년에 한 번, 5월 15일이 되면 ‘선생님인 나’를 일깨워주는 아이들의 연락이 있어서 참 감사하다. 스승의 날이라는 게 학교에 있었을 때는 촌지 문제로 아이들에게 카네이션 하나도 받을 수 없게 되어버려 이럴 거면 차라리 없었으면 싶었던 날이었는데, 학교 밖에 있으니 스승의 날 하루가 이렇게도 큰 의미로 다가온다.


아마도 특별한 일이 없다면 내년쯤에는 학교로, 또 선생님이라는 자리로 돌아갈 것 이다. 이 직업을 선택한 것이 간절히 원했던 일은 아니었지만, 이제 와서는 이 일이 나의 천직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미처 모르고 있던 내 안의 ‘나’가 가장 잘할 수 있고, 가장 좋아하는 일이었음을 이제는 명확하게 알고 있다.


훗날 학교로 돌아갔을 때는 조금 더 나은 선생님이 되고 싶다. 아이를 낳고 키우며 깨닫게 된 ‘세상에 소중하지 않은 아이는 없다’는 진리를 마음 밭에 잘 새기고, 앞으로 만날 수많은 아이들을 모두 귀하게 여길 수 있는 그런 선생님, 아니 ‘참스승’이 되고 싶다.

제자가 그려서 보내준 손편지. 오래 기억되는 스승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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