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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Dec 31. 2024

다시 글쓰기를 시작하는 마음을 담아.

나의 선량 작가님께

 

늦은 답장을 띄웁니다. 참 시리고 아린 12월 31일이에요. 오늘은 제가 태어나 40번째 맞는 12월의 마지막날인데요, 오늘처럼 마음이 무거웠던 12월의 마지막날은 없었던 것 같아요.


이번 12월은 제가 살고 있는 이 나라에 도무지 믿기 힘든 일들이 연이어 일어난 달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연휴를 끼고 있는 연말이란 으레 조금 들뜨고 설레기 마련인데 이번 연말은 어디서도 그런 분위기를 느끼기 어려웠어요. 군대와 시민이 대치하는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아야 했고, 백여 명의 사람들이 한순간에 유명을 달리하는 것을 목격해야 했습니다. 이 문장을 쓰면서도 손이 떨려 몇 번이나 오타를 냈는지 모르겠어요. 이토록 현실감 없는 문장이라니요.


불특정다수에게 수시로 감정이입을 하는 저로서는 매일이 덜덜 떨리고, 펑펑 우는 날들이었어요. 정말 어쩌자고 이런 일들이 2024년에 일어나는지. 믿을 수도, 실감할 수도 없어서 몇 번이나 꿈은 아닐까 의심해야 했어요. 모든 일을 안온한 골방에서 유튜브 화면으로 보기만 했던 제가 이럴진대 온몸으로 군대와 맞서던 시민들은,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은 어떨까요. 그 마음은 감히 짐작할 수도, 해서도 안되겠지요.


일상이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합니다. 너무나 보잘것없는 하루하루들, 그래서 자주 하찮아지고 무가치하게 느껴지는 매일매일들. 그런 날들을 뭉뚱그려 일상이라고 말하곤 하죠. 무료한 일상, 평범한 일상, 보통의 일상. 일상 앞에 붙는 수식어들도 하나같이 지루하기 그지없습니다.


일상의 균열을 경험하고 나면, 일상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당연한 시간이 아님을 실감하고 나면, 일상만큼 소중한 것이 없다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물론 이 깨달음은 영속적이지 않고, 다시금 무료해지고 지루해지지요. 하지만 일상을 잘 지키는 것만큼 중요한 일도, 일상을 잘 누릴 수 있는 것만큼 복된 일도 없다는 건 정말이지 변하지 않는 진리인 것 같아요.


요즘 다시 일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흩어지고야 마는 그저 그런 날들을 매일 기록합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블로그에 비공개로 매일 일기를 쓰면서 잃었던 일상의 소중함을 되새깁니다. 최근에 첫째 아이가 많이 아파서 일주일 동안 자체 자가격리를 했는데요. 일주일 내내 두 아이와 집안에서만 지내는 일이, 매일 돌아오는 삼시 세끼를 혼자 챙기는 일이 보통일은 아니었습니다만. 그리하여 자칫하면 우울해지고 무력해질 수도 있던 날들이었습니다만. 일기를 쓰면서 ‘이만하면 오늘도 잘 흘러갔구나 ‘, ‘이 정도면 오늘도 꽤 괜찮은 날이었구나‘로 매일을 마무리하게 되었어요. 참 희한하죠. 뭔가를 쓰고 나면, 하루를 글로 정리하고 나면 그날 하루가 그냥 지나가는 날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의미를 지닌 날로 남는다는 게.


<다정한 교실은 살아 있다>를 출간하고, 도저히 글을 쓸 수 없는 날들이 이어졌어요. 정말 더는 쓸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제는 그만 써도 되겠다는 어이없고도 배부른 생각까지 들더라고요. 전업작가도 아니고, 유명작가도 아닌 제가 운이 좋아 책을 네 권이나 썼으니 이만하면 충분하다 싶었어요. 책으로 쓸 수 있는 이야기를 다 써냈고, 더는 골라쓸 단어도 써낼 수 있는 좋은 문장도 없겠더라고요.


한동안은 정말 미친 사람처럼 읽기만 했어요. 그냥 무작정 활자를 찾아다녔던 것 같아요. 내가 쓸 수 없는 이야기들을, 단어들을, 문장들을 그저 읽고 또 감탄하며 시간을 보냈어요. 제가 갖지 못한 삶의 지평을 가진 작가들이, 잃어버린 활자들을 너무도 아름답게 써내는 작가들이 부러워 잠깐 또 쓰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어요. 그러면 백지를 꺼내 무언가를 끄적여보았습니다. 이내 실패하기를 반복해야 했지만요. 읽으면 읽을수록 제가 쓰는 글들은 초라하기 그지없고 더할 나위 없이 하찮게 느껴졌습니다


다시는 쓰고 싶지 않을 줄, 쓸 수 없을 줄 알았습니다. 제게 활자들이 다시 찾아온 건 일상을 잃어버릴 뻔했던 순간, 일상을 잃어버린 이들의 눈물을 마주한 순간이었어요. 제가 좇던 건 제가 쓸 수 없다고 여기던 이야기와 아름다운 문장들이었는데, 저를 좇아온 건 결국 제가 쓸 수 있는 일상의 이야기와 문장들이었어요. 누군가를 뒤좇는 글이 아니라, 이제껏 해오던 대로. 묵묵히 나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 그것이 제 글쓰기의 전부였어요.


‘작가님의 글에서 공감과 위안과 편안함을 느끼는 독자들이 있어요.‘


제 글을 무척 아껴주시는 독자님이 이제는 그만 쓰고 싶다는 제게 이렇게 말씀해 주셨어요. 아마도 제 글에는 누구나 경험하는 일상이 있고, 그 일상을 보통의 언어로 편안하게 쓰는 표현이 있기 때문이겠죠. 저 말을 들었을 때는 별 감흥이 없었는데, 다시 일상을 쓰기 시작하면서 저 말이 너무나 와닿았어요. ‘누구나 일상을 살지만 일상을 기록하는 사람은 흔하지 않고, 그러니 내가 써내려가는 일상에 공감하고 위안받고 편안함을 느끼는 분들도 있겠구나‘ 싶더라고요.


생각해 보면, 일상이 너무 초라해서 쓰고 싶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해요. 책으로 엮을 만한, 일상에서 반짝이던 순간들은 이미 다 써버렸고. 이제 제게 남은 일상들은 정말 너무 지루하고 무료해서 쓸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가 봐요. 어쩌면 그 일상에서 또 반짝이는 순간을 발견해 내고 그 기록으로 누군가에게 위안과 공감을 주는 게 제가 지닌 유일한 재능이었을 텐데요.


일 년을 마무리하는 오늘 밤.

저는 지금 첫째 아이의 입원실에 있어요. 이전 같았으면 충분히 일상의 균열이라 느낄 만한 날인데, 너무나 큰일을 목격하고 나니 이건 지극히 평범한 일상처럼 느껴져요. 슬퍼하거나 힘들어하기에도 죄스러워서 이 정도면 충분히 아름다운 일상이다 생각합니다. 병실에서 맞는 새해는 나름 새롭고 오히려 특별한 일로 기억될 것도 같고요.


다시 글쓰기의 첫 마음으로 돌아가 일상을 충실히 기록해보려고 해요. 그렇게 쓰기의 힘을 회복해보려고 합니다. 결국 쓰기로 돌아오는 건, 저나 작가님이나 매 한 가지죠?


작가님이 계신 곳과 제가 있는 곳은 시차가 8시간쯤 있으니 그곳은 여전히 한 해의 마지막 ‘낮’이겠군요. 이곳은 이제 아주 늦은 ‘밤‘이지만요. 이곳의 2024년은 이제 채 한 시간도 남지 않았어요. 참 많은 날들이 켜켜이 쌓였어요. 행복했고 슬펐고, 아팠고 기뻤고, 얻었고 잃었고, 사랑했고 미워했고, 이제는 오직 그리운 기억으로만 남을 날들. 어떤 하루도 그저 그런 날은 없었어요. 모두가 소중한 날들이었어요.


올해의 마지막 날을 잘 보내주시길. 새해에는 작가님의 날들이 슬픔보다는 기쁨에, 불행보다는 행복에, 잃음보다는 얻음에, 미움보다는 사랑에 가깝기를 소망합니다.


올해도 함께 쓸 수 있어 영광이었어요.

늘 진심으로 그리워하고 있어요.


멀리 대구에서.

진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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