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좋은 날은 없을 것 같다

by 진아

긴 연휴가 끝나간다. 엄마가 된 후로 긴 연휴가 다가오면 여러 가지로 마음이 분주해졌다. 특히나 이번처럼 어린이를 위한 날이 포함된 연휴라면 더더욱 그렇다. '무엇을 해야 하지? 어떤 선물을 사줘야 하지? 어디를 가야 하지?' 아이들이 즐거운 시간이 되도록, 아이들의 마음에 오래 남는 날이 되도록 고민해야 했다. 고민한다고 해서 특별한 답이 나오지도 않지만, 그래도 뭐라도 해야 한다는 압박 같은 것이 자꾸만 밀려왔다.


이번에도 고민은 깊었지만 답을 찾지 못한 채 맞이한 연휴였다. 맞이했다기보다는 '맞닥뜨렸다'라는 표현이 더욱 적절하게 느껴질 만큼 아무런 계획을 세우지 못한 상태였다. 연휴 전날까지 중간고사 기간이었고, 옮긴 학교에서 치르는 첫 시험이라 나도 학생들 못지않게 긴장을 했다. 시험의 끝이 곧 연휴의 시작이었기에 뭔가를 준비할 틈이 없었다. 더군다나 요즘 남편의 몸이 좋지 않아 아이 둘을 거의 혼자 돌보는 상황에서 무리한 여행 계획을 세우기도 어려웠다. 곧이어 어버이날도 다가오니 친정에 가볼까 계획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아 어렵게 구한 기차표도 취소해야 했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듯한 나흘 간의 연휴가 시작되었다. 첫째 날과 마지막 날은 첫째 아이의 축구 훈련이 예정되어 있어서 그걸 핑계삼을 수 있었다. 고민은 날씨가 너무도 좋다고 예정된 둘째 날과 어린이날 당일이었다. 뭘 해야 하나 곱씹어 고민하던 차에, 늘 함께 육아를 해온 나의 육아 동지들이 떠올랐다. 첫 학교에서 만나 비슷한 시기에 결혼과 출산을 해, 아이들을 거의 같이 키우다시피 한 나의 동생들! 동생들과의 단체 톡방에 메시지를 띄웠더니 모두 반색하며 좋아했다. 동생들도 특별한 계획 없이 긴 연휴를 보낸다고 했다.


공동 육아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금세 마음이 푸근해졌다. 연휴 둘째 날 아침, 아이들 간식에 엄마들 커피에, 돗자리와 축구공, 캐치볼 도구까지 카트 가득 싣고서 동생들을 만났다. 날씨가 어찌나 좋은지, 하늘만 보고 있어도 '5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어린이날 노래가 절로 나왔다. 엄마 셋, 아이 다섯은 언제나처럼 누가 누구의 엄마인지, 누가 누구의 아이인지 구분하지 않고 함께 신나게 놀았다. 엄마 하나가 아이 둘의 그네를 밀어주면, 엄마 하나는 아이 하나와 캐치볼을 하고, 엄마 하나는 아이 둘과 모래놀이를 했다. 아이들은 엄마 셋을 모두 제 엄마인양 온전히 누렸고, 엄마 셋은 번갈아가며 수다를 떨고 커피도 마시며 휴일을 온전히 누렸다.


잠깐, 아이 다섯으로 말할 것 같으면 초등학교 2학년 남자아이 둘, 일곱 살 남자아이 하나와 여자 아이 하나, 다섯 살 남자아이 하나로 성별도 나이도 제각각이다. 사실 성향도 너무너무 다른 아이들이라, 만약 학교나 유치원에서 만났다면 친구가 되기 어려웠을 아이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기였을 때부터 엄마들의 손에 이끌려 봐 와서인지, 다섯이 만나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누구 하나 우는 아이, 다투는 아이가 없다. 나이대가 다르다 보니 형, 오빠들은 동생들을 챙기고, 동생들은 형과 오빠들을 따른다. 다섯이나 되다 보니, 둘셋씩 알아서 조를 맞춰 이 놀이도 좀 했다가 저 놀이도 좀 했다가 하며 잘 논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는 엄마들은 그저 흐뭇할 따름이다.



헤어지기 싫다는 아이들의 성화에 결국 한 집에 가서 저녁까지 시켜 먹은 뒤에야 각자의 집으로 흩어졌다. 연휴 하루를 그렇게 잘 보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연휴를 마무리하며 첫째 아이가 일기 쓰기 숙제를 한다고 했다. 특별한 곳으로 여행을 간 것도 아니고, 대단한 선물을 준 것도 아니라서 혹시라도 아이의 입에서 볼멘소리가 나오지는 않을까 조금 긴장했다. (어린이날이라고 사준 선물은 플라스틱 야구 배트와 알라딘 중고 서점에서 고른 책 두 권이 다였다.) 그런데 아이는 별말 없이 일기를 쓰기 시작했고, 이내 "엄마, 혹시 맞춤법 틀린 거 있는지 좀 봐줘!"라며 일기장을 내밀었다.


그리고 나는,

긴 연휴 동안 아이를 보살핀 보상을 받았다.

아이는 연휴 둘째 날 이모들, 동생들과 공원에서 논 이야기를 일기에 썼는데, 그 일기의 마지막 문장이 이것이었다. "이렇게 좋은 날은 없을 것 같다." 연휴 내내 별로 해준 것이 없는 것 같아서 내심 미안했었는데, 이렇게 좋은 날은 없을 것 같다니.


그러고 보면 아이는 한 번도 내게 대단한 것을 바라지 않았다. 해외여행을 데려가 달라고 한 적도 없고, 고가의 선물을 사달라고 한 적도 없다. 비싼 레스토랑에 데려가 달라고 한 적도 없고, 표를 구하기 어려운 공연을 보여달라고 한 적도 없다. 아이가 내게 원한 것들은 언제나 너무나 소박하고 일상적인 것들이었다.


"엄마, 나랑 캐치볼 하자."

"엄마, 나랑 자전거 타자."

"엄마, 나랑 밤산책 하자."

"엄마, 나랑 축구 연습 하자."

"엄마, 나 그리스로마 신화 책 읽어줘."

"엄마, 나 엄마가 끓여준 진라면 먹고 싶어."

"엄마, 나 엄마가 해주는 핫케이크 먹고 싶어."

"엄마, 나 축구 훈련 끝날 때 데리러 와줘."


아이가 최근에 나에게 요구했던 것들을 떠올려본다. 너무나 작은 일들, 너무나 사소한 일들. 거창한 것을 바란 적이 없는 아이에게 내가 줄 수 있었던 최고의 선물은 '함께 하는 시간'이었나 싶다. 여전히 엄마가 최고인 아이들에게는 별다를 것 없던 그 하루가, '이렇게 좋은 날'이 될 수도 있었겠구나 싶다.


아이와 함께 하는 모든 순간이 '이렇게 좋은 날'들이다. 물론 매 순간이 다 아름답지는 않지만, 그 기저에는 크고 넓은 사랑이 있다는 것을 나도 아이도 알고 있다. 오늘 아이의 일기를 통해, 이제 더는 긴 연휴가 와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한다. 대단한 계획이 없어도, 거창한 이벤트를 벌이지 않아도, 우리가 함께 하는 순간에, 서로에게 온전히 몰입하는 순간에, 행복이 있고 사랑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렇게 좋은 날은 없을 것 같다.'

오늘도 아이에게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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