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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Jun 04. 2020

과학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인문학적 사고를 하다

두 번째 시간-『숨 』(테드 창)

9개의 단편 소설로 구성된 '숨'은 정말 엄청난 상상력의 산물이었다. 그 상상력이 얼마나 구체적인지,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이야기가 너무나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당장에 시간여행의 문을 열고 들어가 나의 과거와 만날 수 있을 것 같았고, 웹상에서의 인공지능이 나의 반려동물이 될 것도 같았다. 또 내 몸에 장착한 카메라로 내 삶의 모든 순간이 기록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었고, 어쩌면 외계에 우리와 비슷한 아니 어쩌면 우리보다 더 진화한 생명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책을 읽는 내내 엄청난 상상력과 그 상상력을 섬세하게 그려낸 표현력으로 어쩌면 눈앞에 닥쳤을지도 모르는 낯선 테크놀로지를 생생하게 간접 경험할 수 있었다. 또한 과학적 소재를 활용하고 있지만, 이야기 전반에 인문학적 사고가 바탕이 되어 있어서 어떤 인문서들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많은 생각거리를 남긴 책이기도 했다.




9개의 이야기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단편은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이다.

어떤 사건에 대해 있는 그대로의 기록은 사실적 진실이지만, 그 사건을 겪으며 느낀 감정이 개입된 기억은 감정적 진실이다. 감정적 진실이 기억 속에 남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사건 자체보다는 그 당시에 느낀 감정이 더 크게 남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 보니 때로는 기억이 재편되기도 하고 때로는 왜곡되기도 한다. 그렇게 재편되고 왜곡되는 것은 그 기억으로 인해 오래 행복하기 위한, 또는 오래 아프지 않기 위한 인간이 가진 최소한의 방어막이다. 그런데 그런 방어막이 존재할 수 없는, 날 것 그대로의 사실적 진실이 생생히 담긴 영상 기록이 있다면?



          

이 단편은 기록과 기억에 대한 서로 다른 두 이야기가 동시에 전개되고 있는 독특한 구조의 이야기다. 하나는 저널리스트인 ‘나’가 리멤이라는 검색 툴에 대한 기사를 준비하면서 겪은 일과 그로써 깨달은 바에 대한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나’가 리멤 기사를 준비하며 모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창작한 티브족이라는 부족의 이야기이다.          


‘나’라는 인물은 저널리스트로 새로운 소프트웨어에 대한 특집 기사를 준비하던 중에 ‘리멤’을 접하게 되고, 오래전 기억 속에 남아 있던 딸과의 언쟁 장면을 보게 된다. ‘나’는 지금까지 그날을 딸이 자신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는 말을 쏟아낸 날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지만, 사실은 자신이 딸에게 그런 말을 쏟아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완전히 왜곡된 기억 속에는 사실적 진실은 온데간데없고, 오로지 그 당시의 힘들고 지쳤던 감정으로 물든 감정적 진실만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 장면을 리멤을 통해 확인했을 때, ‘나’는 쉬이 믿지 않았지만, 그 기록은 정확한 것이었다. 결국 테크놀로지의 힘을 빌려 얻은 디지털적 기억의 진짜 혜택은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고 딸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하게 된다.

그런 ‘나’가 창작한 티브족의 이야기는 기억에 의지하여 오로지 말로만 의사소통을 이어가던 티브족 마을에 선교사 한 사람이 와서 부족민 중 한 명에게 글자를 가르치면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한 것이다. 글자를 모르던 때와 달리 글자를 통해 기록이라 것을 하게 되자, 기억보다 기록을 신뢰하게 되었다. 말과 기억에 의존하던 시대에는 역사를 어렵지 않게 조정할 수 있었지만,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하자 그럴 수 없게 된 것이다.

두 이야기가 묘하게 병치되면서 결국 구전 문화가 문자 문화를 막지 못한 것처럼, 이야기 속 세상의 사람들이 자신의 기억보다 디지털적 기억을 채택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야기의 말미에 이르면 다음과 같은 서술이 나온다.          



그러나 내가 리멤을 추천하는 이유는 그것이 과거의 수치스러운 행위를 상기시키기 때문이 아니라 장래에 당신이 그런 행위를 되풀이하는 것을 피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 리멤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제공해주는 한, 나의 자아상이 진실에서 너무 멀어지는 사태 자체가 불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디지털적 기억이 우리가 스스로에 관해 이야기하는 행위를 멈추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앞서 말했듯 우리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고, 그 무엇도 그 사실을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디지털적 기억이 그 이야기들을 최상의 행위를 강조하고 최악의 행위를 생략하는 우화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스스로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섣불리 재단하지 않는 진실한 기록으로 바꿔주기를 희망한다. (330쪽)


'나'는 리멤의 단점은 분명하지만,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리멤을 다른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이야기를 쓴다. 스스로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할 수 있는 도구로써 리멤의 가치를 인정한 것이다.




나의 모든 일과가 녹화되고 언제든 내가 원할 때, 혹은 필요할 때 재생할 수 있다는 것은 과연 어떤 점에서 의미가 있을까? 이야기 속에서는 ‘리멤’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기록 장치가 실제 한다면 나는 그 장치를 사용할 용의가 있는가?      


내가 사랑한 사람들을 잃고 난 후 그들에 관한 기억을 생생한 영상으로 언제든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나를 사랑했던 누군가가 나에 대한 기억을 한 편의 영화처럼 생생히 살려내어 언제든 재생할 수 있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일 것이다. 어떤 일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 때도 녹화 영상이 있다면 아주 유용할 것이다. 또 주인공처럼 내가 어떤 일에 대해 잘못을 저지르고도 오랫동안 그 잘못을 왜곡해서 기억하고 있었다면, 기록 장치를 통해 진실을 확인한 뒤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디지털적 기억장치를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대가 정말로 온다면, 사람들은 아주 사소한 일에도 수없이 과거의 영상을 돌려보며 ‘옳고 그름’을 가리려 할 것이다. 또 잊고 싶은 수많은 기억들을 생생하게 간직한 리멤 앞에서 인간은 무기력한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이 실시간으로 녹화되는 현실에서 어쩌면 작은 행동 하나까지 자기 검열을 하며 스스로의 삶을 옥죄는 사람들이 생길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리멤을 통해 언제 어디서든 과거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으니, 소중하고 귀한 기억들을 곱씹고 되새기며 기억하고자 노력할 이유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런 장치가 내 삶에 주는 유용함이 분명하고 명확하더라도 그 장치를 사용할 마음을 먹지는 않을 것 같다. 그리운 사람은 마음으로 그리워하고, 내 잘못으로 상처 받는 사람들이 없도록 평소에 주변을 잘 살피는 것으로 유용함은 대체하고 싶다.




문득 생각해본다. 나는 얼마나 많은 일을 기억하며 살고 있을까. 또 그 기억은 얼마나 많이 재편되고 왜곡되었을까. 내 기억에서 망각된 수많은 일들은 나의 어떤 감정으로 인해 잊혔을까.




당신은 '리멤'을 사용할 용의가 있으신가요? 있다면 어떤 장면을 재생하고 싶으신가요? 또 없다면 왜 사용하고 싶지 않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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