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유행하는 대로 줄여 말하면 나는미. 알. 못(미술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림 그리는 데는 소질도 흥미도 전혀 없어 졸라맨의 형상으로 사람을 그리고 꽃이나 나무도 정형화된 틀 안에서 겨우 모양만 흉내 내는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미술관 가는 것을, 또 미술 작품을 보는 것을, 더불어 미술 에세이를 읽는 것을 아주 많이 좋아한다.
학창 시절에 나는 유난히도 미술 시간을 싫어했다. 그렇다고 해서 음악과 체육 시간을 좋아한 것도 아니다. 예체능에 재능도 소질도 흥미도 없던 나는 예체능 시간이 모두 싫었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미술관 가기, 음악 듣기, 요가 하기를 아주 좋아하게 되었으니 인생은 참 살고 볼 일이다. 아무튼 그나마 악기 연주와 체육 활동은 부단한 연습으로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었지만, 연습으로도 도무지 되지 않던 그림 그리기, 만들기를 매번 해내야 하던 미술 시간은 정말 지옥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땐가, 한 번은 미술 선생님이 수채물감으로 풍경화를 그리는 수업을 하자시며 운동장으로 우리를 데리고 나가신 적이 있다. 벚꽃이 흩날리던 봄날이었는데 교실을 벗어나서 밖으로 나가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렜다. 미술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자신이 그리고 싶은 곳을 정해서 편히 앉아 보이는 장면을 그대로 그려보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자연의 색채를 담아서 그대로 채색을 해보라고 하셨다. 그림을 그리는 방법도, 색깔을 골라서 칠하는 방법도 가르쳐주지 않으셨고,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가슴이 느끼는 대로 그리라고 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낭만적인 분이셨다. 하지만 교사로서 친절한 분은 아니셨던 것 같다. 그림을 그리고 색을 칠하기에 거부감이 있던 나는 선생님을 말씀을 듣는 순간, 교실을 나서던 설렘이 사라지고 하얀 도화지와 떨리는 손만 남은 느낌을 받았다. 두 시간 안에 뭔가를 그리고 채색도 해야 한다니 마음은 급한데 손은 움직이질 않았다. 지우고 그리기를 반복하며 완성한 스케치는 눈앞에 펼쳐진 풍경과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다. 대충 색을 입힌 그림은 더했다. 그때의 속상함과 허탈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 뒤로 나는 미술 시간이 더 싫어졌다.
내가 미술 과목에 하도 스트레스를 받아 하자 엄마는 없는 살림에 나에게 미술 과외까지 시켜주셨다. 동네에 작은 방을 얻어 그룹과외를 하는 미술 선생님이 계셨는데, 일주일에 두 번 그 선생님 댁에 가서 스케치하는 방법과 채색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 덕에 그림을 어떻게 그리는지, 색깔을 어떻게 선택하는지 조금은 알게 되었지만 그것이 미술 전반에 대한 흥미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그랬던 내가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생애 처음으로 떠났던 해외여행을 준비하면서였다. 이탈리아와 프랑스로의 여행을 준비하며 그래도 유럽을 가는데 미술관을 안 갈 수는 없다며 사 읽은 책 두 권이 내 삶을 바꾸었다. ‘아트 인문학 여행' 파리 편과 이탈리아편이었는데 어떤 경로로 그 책을 알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 두 권의 책은 여행 내내 나와 함께 했던 책이었으며 처음으로 미술 작품을 보는 것에 흥미를 느끼게 해 준 책이었다. 그 책들은 그림을 잘 그리는 것과 미술 작품 보기를 좋아하는 것에는 어떠한 상관 관계도 없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 이후로 미술 관련 에세이를 발견하면 무작정 사서 읽는 시기가 한동안 계속되었고, 내가 좋아하는 책 장르 중 하나에 미술 에세이가 추가되었다.
‘미술에게 말을 걸다(이소영 저)’는 그런 맥락에서 읽게 된 책이다. 우연히 SNS에서 책에 대한 홍보 글을 보게 되었는데 요즘 육아에 매진하느라 미술관 갈 틈도 없었고, 미술 관련 책도 읽을 새가 없었기에 오랜만에 가볍게 읽어보자는 마음으로 구매해서 읽게 되었다.
미술 입문자들을 위한 책이라더니 정말로 아이를 보는 중간에 읽기에도 큰 부담이 없는 책이었다. 미술 작품을 보면서도 자신에게 밀려드는 생각과 감정이 정답인지 아닌지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작품을 보는 데 정답은 없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책이었다.또 미술 작품에 갓 취미를 붙이려는 사람들에게 자신만의 취향을 갖는 방법을 작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읽기 쉽게 서술한 책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얻은 의외의 수확은 그동안 모르고 살았던 화가 한 사람을 알게 된 것이다. 존 앳킨슨 그림쇼(1836~1893)라는 화가로, 영국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고 한다. 미술 교육도 받은 적 없다는 그의 작품 한 점이 내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았다. 작품 제목은 ‘달빛’으로 어두운 밤하늘에 흐릿하지만 유일하게 밝은 보름달이 하나 떠 있고, 길에는 한 사람의 뒷모습만 보인다. 가지가 앙상한 나무들이 길가에 서있고, 날은 흐리다.
183쪽. 내 마음을 뺏은 그림, '달빛'
그림을 보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해졌다. 누군가는 쓸쓸함을 느꼈을 법한 그 그림에서 나는 안정과 고요를 느꼈다. 아마도 두 아이가 모두 잠든 밤, 그리 밝지 않은 등 하나만 켜놓고는 책을 읽던 중이라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그와 관련된 에세이 내용을 읽으며 그에게 매료되어 관련 블로그도 찾아보고, 훗날 영국 런던에 가서 그의 그림을 꼭 직접 보고 싶다는 마음도 생겼다. 가볍게 읽기 시작한 책에서 얻은 큰 수확이었다.
훗날 아이들이 조금 더 자라고 나면 함께 미술관을 거니는 상상을 한다. 한 작품 앞에 주저앉아 “너는 이 그림을 보니 어떤 마음이 들어? 엄마는 이런 마음이 들어.”라며 정답 없는 이야기들을 주고받을 날을 상상한다. 그런 날을 위해서 조금 더 많은 미술 에세이를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식적으로 더 많이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술 작품을 보는 데는 정답이 없다는 확신을 얻기 위해서 말이다.
내용이 입문자들을 위한 것인 만큼 어렵지 않고, 서술도 읽기 쉽게 되어있었다. 누구나 미술 작품에 대한 관심이 있다면, 혹은 앞으로 미술관을 거니는 취미를 가져보고 싶다면 가볍게 읽을 수 있을 만한 책이다. 그렇게 읽다 보면 나처럼 그 책 속에서 의외의 수확을 얻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