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생각이 많아서 글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우선 저는 일본에 대해 무조건적인 반일감정을 가진 사람이 아님을 밝힙니다. 미니멀리즘을 근간으로 한 일본의 문화와 예술을 좋아하며, 그들의 장인정신과 단정함을 높이 삽니다. 그리고 일본 음식도 좋아하고, 일본의 만화책과 애니메이션을 즐겨 보며, 고레에다 히로가즈 영화의 작품성을 높이 삽니다. 그렇지만 나치 전범들을 벌한 독일과 달리, 자신들의 과거를 외면하는 일본의 모습에는 분노합니다. 그리고 역사 의식이 결여된 일본인들이 저지르는 착각과 실수는 제게 불쾌함으로 다가옵니다.
<마지막 레시피:기린의 혀의 기억>이라는 긴 제목을 가진 일본 영화를 봤습니다. 그 날 좀 피곤해서 요리하는 영상이나 볼 목적으로 선택한 영화였어요. 그런데 영화를 보다가 분노한 나머지, 오히려 피로가 몇 배로 가중돼 버리고 기분 나쁜 꿈까지 꾸었습니다. 그래서 엉성한 퀄리티에 말도 안되는 내용을 담은 영화에 관한 글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영화의 배경은 1930년대 초 중국의 만주입니다. 만주를 점령한 일본군이 천황의 방문에 대비, 만찬을 준비하기 위해 일본인 요리사를 불러들입니다. 그 요리사는 중국인 조수와 함께 새로운 메뉴 개발을 하는데, 그 둘은 요리를 통해 국경을 넘어선 신뢰를 쌓게 됩니다. 그런데 그 만찬에는 겨우 명맥을 이어가던 중국 왕실의 숨통을 끊어내고, 만주를 집어 삼키려던 일본의 음모가 숨어 있었습니다. 계획인즉, 황제의 음식에 독을 넣고 중국인 요리사를 범인으로 지목하는데, 배후엔 중국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가 있다고 누명을 씌운다는 것이었죠. 음식에 독을 넣는다 해도 과거 왕들은 미리 맛을 보는 신하들을 두고 있었으니, 천황이 목숨을 잃을 일은 없는 겁니다. 그리고 이 음모를 통해 일본은 큰 힘 안들이고 중국 황실을 끌어내릴 수가 있는 것이었죠.
영화는 여기서부터 눈꼴시려운 나르시즘에 빠집니다. 일본인 요리사는 ‘요리는 사람 살리는 일에 쓰여야 한다’며 중국인 요리사를 도망시켜 주고, 휴머니스트를 코스프레하면서 죽어갑니다. 덕분에 목숨을 건진 중국인 요리사는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 그와 개발한 레시피를 고이 간직, 죽은 요리사의 손주에게 넘겨 준다는 내용인데, 영화에서 중국인 요리사가 한 대사가 가관이었습니다. “중국인인 나를 위해서...중국인인 나 때문에...” 이 장면에서 저는 거의 티비 전원을 뽑을 뻔 했네요. 일단 저 대사에는 일본인이 중국인 보다 우위에 있다는 나르시즘이 충만합니다. 중국 요리사는 나 따위를 위해 희생하신 일본분을 추억하며 오열하거든요. 그런데 더 분노할 일은, 자신들이 학살하고 생체 실험을 한 중국인들이 수십만인데, 겨우 소설 속에서(영화의 원작은 소설) 중국인 한 명 살려 놓고 자아도취에 빠지다니요. 일본에선 역사 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더니, 그래서 이런 말도 안되는 창작물이 나오는가 봅니다.
더구나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역사와 불의에 대한 구체적 자각없이 죽음을 맞는데, 등장 인물들은 그를 의인이라 추켜세웁니다. 그러나 내겐 그의 죽음이 억지스러웠던데다 초라하기까지 하더군요. 그는 일본인들의 나르시즘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만들어진 플롯에서 맥없이 죽음을 당한 픽션 속의 주인공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일본의 나르시즘에 대한 대표적 예로 욱일기를 지적하고 싶습니다. 욱일기는 메이지 유신 이후부터 일본의 군기로 쓰인 긴 역사가 있다지만, 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의 군기로 잘 알려져 있고, 그래서 나치의 하켄크로이츠와 동일시 되는 경향이 있죠. 일본이 당시 저지른 만행은 나치의 유태인 박해 만큼 잔인했으니까요. 다른 점이 있다면, 독일은 나치 전범들을 처벌하고 하켄크로이츠 사용을 형법으로 다스리는 것과 달리, 일본은 자신들이 나서서 저 디자인을 퍼뜨린다는 겁니다. 그들은 심지어 올림픽 때 자국 선수들에게 욱일기 문양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혀놓고 자랑스럽다는 기사까지 냈었지요. 독일 선수가 나치 유니폼을 입고 참가하는 올림픽을 상상할 수나 있나요!
저 사진은 2007년에 제가 살고 있는 밴쿠버의 한 축제에서 십대 청년들이 공연하고 있는 장면을 찍은 것입니다. 공연과 아무 상관없는 욱일기가 걸려 있어서 제가 경악을 했었습니다. 욱일기는 영어로 Rising Sun이라 불리는데, 한 십 년 전에 패션 트랜드가 된 적이 있었어요. 저 문양이 새겨진 모자며 가방, 티셔츠 등이 이곳 아이들에게 인기템이었죠. 깃발에 담긴 의미는 무시된 채 말입니다. 2차 대전 때, 저 깃발 아래서 일본의 군인들은 무고한 사람들에게 칼질을 해대고 어린 여자이이들을 납치해 위안부로 만들어버렸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치부를 가리기에 급급한 일본은 역사를 외면, 심지어 과거를 영광이라 착각하고, 과거 자신들이 한 만행에 스스로 면죄부를 주는 나르시즘에 빠져 있는 거 아닌가요.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원죄의식을 느껴야할 저 깃발을 바이러스 처럼 퍼뜨립니까?
어린 소녀들이 다 자라지도 못한 자궁으로 하루 수십명이 넘는 군인들의 폭력을 받아냈을 때에도, 바로 저 전범기가 펄럭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한 여류 작가는 위안부들은 가만히 누워서 남자만 즐겁게 해줬는데, 뭐가 고통스러웠냐는 막말을 했습니다. 그 때 전 그 여자는 치료가 필요한 나르시스트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대 일본 제국을 위한 일인데 뭐가 대단하냐는 착각과 오만이 깔린 구제불능 자뻑에 빠져 있는 것이죠. 저런 정신질환 환자가 작가랍시고 써대는 글이 바로 위에 소개한 영화 같은 결과물로 나오는 겁니다.
저런 일본인들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처참한 영화 흥행성적과 악플 폭격을 맞으신 분이 있습니다. 애니메이션의 거장이라 불리우는 미야자키 하야오인데요, 전쟁에 사용됐던 비행기인 제로센을 소재로 했다해서 한국 관객들에게 심한 냉대를 받으셨습니다. 사실 2차 대전 때 일본에 관한 것은 무조건 한국인들의 반감을 삽니다. 반성과 사과가 없이 자뻑 모드에 빠져 있는 일본인들이 존재 하는 한 계속 그러할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연주의자이자 반전주의자입니다. 작품에서 뿐만 아니라 실 생활에서도 원전건설 반대 시위까지 참여한 그가 <바람이 분다>를 내놓자, 그의 작품답지 않다는 비평을 받았었죠. 심지어 이젠 늙어서 노망이 들었다는 독설까지 들어야 했습니다. <붉은 돼지>에서 “파시스트로 사느니 돼지로 살겠다”라는 대사를 날린 그가 살상무기였던 제로센 설계자인 호리코시 지로에 관한 애니메이션을 만들었으니까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는 일본 극우주의자들의 공격 또한 받았습니다. 영화에 나오는 “히틀러 정권은 깡패, 만주국 건설은 잊는 게 낫다, 일본과 독일은 이러다 파멸한다” 등의 대사에 반발한 것이죠.
결국 미야자키 하야오는 한국와 일본 양 쪽에서 다 비판을 받았는데, <바람이 분다>를 두 번 봤고 미야자키 하야오의 다큐멘터리를 본 제가 볼 때 이건 전쟁을 옹호하는 영화가 아닙니다. 한 예로 “비행기 연결고리 하나로 굶주린 아이들을 여럿 먹여살릴 수 있다”라는 주인공의 대사와 실제 굶주리는 아이들이 등장하는 것만 봐도 그렇지요. 단지 안타까운 점은 다른 작품과 달리 이 영화에서는 자신의 신념을 명확히 드러내지 않아서, 오해의 소지가 충분하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건 미야자키 하야오는 비행기 오타쿠이고 작품에서 비행기를 자주 등장시켰다는 사실이죠.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신은 반전주의자이지만, 동시에 전투기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 말합니다. 그 이유는 아름다워서라는군요. 사실 전투기는 어린 사내아이라면 다들 매력있어 하는 것인데, 늙어서까지 비행기를 좋아하는 그는 키덜트족이 분명합니다. 즉 그는 제로센의 설계자인 호리코시 지로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꿈을 따라가는 인간의 이중적인 모습을 그려낸 것이 아닐런지요. 이를 받침하는 증거로 그의 아버지는 2차 대전 때 비행기 부품으로 부를 쌓았는데, 그 백그라운드에서 안락하게 살아온 그가 영화에서 친자연과 반전을 외치다보니 자신의 모습에서 모순을 느낀 게 분명합니다.
2016년 무라카미 하루키는 안데르센상을 수상합니다. 그런데 정작 뉴스가 된 것은 노벨상에 자주 언급됐던 그가 안데르센 수상을 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수상식에서 한 그의 연설이었습니다. 그는 안데르센 동화 중 <그림자>를 예로 들며 일본인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멘트를 날렸습니다. 자신의 그림자를 외면한 사람이 결국 그 그림자에 의해서 파멸된다는 동화의 내용을 언급하면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모든 사람이 그림자를 갖고 있듯이 국가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있으며 이를 감춰서는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구체적으로 국가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일본이란 걸 모두 알 수 있었지요.
하루키는 “아무리 벽을 높게 쌓고 외부인을 차단해도, 아무리 역사를 우리 구미에 맞게 고쳐 써도, 결국은 그러한 시도들이 우리를 다치게 하며 그림자는 우리보다 더 강력해져서 돌아온다”며 노골적으로 일본의 역사 왜곡까지 비판해버렸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비판만 한 것이 아니라 “참을성 있게 그림자와 살아나가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림자는 더 강력해져서 돌아온다.”라고 하며 앞으로 일본이 나가야 할 방향 제시까지 해주었죠.
저는 지금 모국의 치부를 드러내며 소신 발언을 한 하루키의 양심이 혹시 중국에 대한 죄의식에서 비롯된 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음식과 커피, 위스키를 좋아하지만 그는 중국 음식을 일절 입에 대지 않습니다. 어릴 때 아버지가 중국에서 했던 일을 듣고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중국 음식만 보면 구토를 느낀다는 겁니다. 하루키의 아버지는 학생 신분으로 강제 징집돼서 중국에서 복무했는데, 그 일로 평생 죄책감에 시달렸고 이는 아들의 트라우마가 됐습니다. 이런 걸 보면 일본의 전체주의에 희생된 개인의 삶은 제로센 설계자인 히로코시 지로가 아니라, 하루키 처럼 전쟁 후유증을 대물림 받은 경우가 아닐런지요. 자신의 아버지, 삼촌이 전쟁 때 저지른 만행이 너무나 잔인해서 후세까지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일본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나치 부역을 했던 후손들이 받는 충격과 같을겁니다.
그 충격이 두려워서인지, 아니면 자신들이 저지른 과오가 정말 없다는 착각인지, 아직도 일본엔 과거 자신들이 살륙을 통해 확장한 영토와 부를 그리워하며 나르시즘에 빠져 있는 환자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루키 같은 양심과 지성을 가진 사람도 있으며, 미야자키 하야오 처럼 개인의 관심에만 집중하는 사람도 있지요. 그래서 저는 한가지 시선으로 일본을 보지 않으려 노력하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훌륭한 것은 자신의 치부를 드러낸 솔직함도 있지만 무엇보다 양심과 객관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