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볼쇼이 발레단은 <Bolshoy Ballet in Cinema>라는 타이틀 아래, 자신들의 레퍼토리를 매년 극장에서 상영합니다. 발레 공연을 필름에 담아 영화처럼 보여 줌으로써 순회공연의 한계성을 극복하려는 것이죠. 세계적인 스타 댄서들을 보유하고 있음은 물론, 코르 드 발레(Corps de Ballet, 군무를 추는 무용수들)까지 흠잡을 때 없이 훌륭한 볼쇼이로서는, 자신들의 명작을 더 많은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겁니다. 그래서 한정적이나마 영화관에서 그들의 레퍼토리를 상영하고 있는 것 같아요.
<Bolshoy Ballet in Cinema>는 발레를 상영하기 전에 스크린에서 볼쇼이 극장의 전경과 로비에서 극장으로 이동하는 관객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어 극장의 커튼이 올라가는 장면과 함께 공연이 상영됩니다. 1막이 끝난 뒤에도 객석을 뜨는 관객들이 스크린에 비치면서, 영화관에 있는 관객들도 휴식 시간을 갖도록 했는데, 이렇게 영화 속 시간과 현실의 시간을 같이 진행시킨 것이 흥미롭더군요. 이는 스크린 밖에 있는 관객들이 단순히 관찰자로 머물러 있지 않고, 간접적이나마 현장에 동참할 수 있도록 있도록 배려한 것이라고 봅니다.
이외에도, 영화관에서 발레를 보는 관객들을 위해 노력한 서비스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커튼 뒤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여과 없이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막이 오르기 전, 커튼 너머에 있는 무용수들이 서로 담소를 나누고, 몸을 풀거나, 같은 동작을 반복해서 연습하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많은 발레 공연을 봐 온 저로서도 처음 하는 체험이었어요. 뿐만 아니라 공연 현장에서는 좀처럼 볼 기회가 없는 오케스트라의 모습을 스크린에 담았는데, 이런 시도는 영화에서 비하인드 씬이나 스토리를 나중에 공개하는 것과 같은 선 상에 놓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조명 또한 무대 조명을 최대한 살렸더군요. 영화의 조명과 다르다 보니 화면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은 단점도 있었습니다만, 무대의 분위기를 최대한 전달하려 한 노력에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발레란 관객들 앞에서 공연하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작품이 필름에 담겨야만 영화로 인정되듯이, 오케스트라와 무용수가 관객 앞에서 연주하고 춤을 추어야만 발레 공연이 성립됩니다. 바로 이 태생적 한계로 인해서 이미 본 공연을 다시 볼 수 없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것 또한 ‘일회성’이라는 발레의 특성으로 간주됩니다. 내 앞에서 무용수들이 아름다움을 뽐내고, 스토리에 따라 슬퍼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생생히 보는 것이 진정 발레인 겁니다. 비슷한 예로, 80년 대 초반에 TV에서 연극을 방영했으나 호응을 얻지 못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문화 예술의 저변 확대라는 기치 아래 제작된 프로그램이었지만, 배우들의 숨소리를 느껴가며 봐야 할 연극을 브라운관으로 보여 준 것이 무리였습니다. 당시 고등학생 연극광이었던 저도 그 프로그램을 몇 번 보다가 말았으니까요.
편집의 예술인 영화와 달리 발레는 전체 무대를 봐야 제대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객석에서 무대를 바라보는 시선에 맞춰 안무와 연출이 짜여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Bolshoy Ballet in Cinema>는 편집을 통해 무용수의 얼굴만 클로즈 업 한다거나, 무대의 일부만을 보여주곤 했습니다. 카메라를 한 군데 고정시키면 관객이 지루해질 수 있으므로 영화적 기술을 사용한 것은 이해합니다만, 클로우즈 업을 할 때 스크린에서 배제된 무대가 저는 아쉬웠습니다. 그리고 <지젤(Giselle)>의 경우, 10대 후반의 지젤 역할을 30대 후반의 프리 마돈나인 스베틀라나 자하로바(Svetlana Zakharova)가 연기했는데, 얼굴을 클로우즈 업하니 환상이 순간에 깨져 버리더군요.
1막에선 순진한 시골처녀를, 2막에서는 사람이 아닌 혼령을 연기해야 하는 <지젤>은 성숙한 프리 마돈나가 배역을 맡는 경우가 많습니다. <Bolshoy Ballet in Cinema>에서도 경력이 많은 스베틀라나 자하로바가 공연했고, 그녀의 지젤은 너무도 감동적이고 훌륭했습니다. 특히 2막에서의 그녀는 단지 몸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인간 세계를 떠난 아름다운 혼령, 그 자체였어요. 그렇지만 클로우즈 업된 그녀의 얼굴은 어린 처녀 아이로 보기엔 무리가 있어 일루전이 단숨에 무너져 버리더군요. 관객과 무대 사이에 있는 보이지 않는 선을 카메라가 넘어섰으니 당연한 결과입니다. 대부분의 발레가 프로시니엄 무대(Proscenium Stage, 커튼을 가운데 두고 무대와 객석을 분리하는 무대)에서 공연되는 이유가 분명 있는 것인데 말이죠.
지금까지 저는 영화관에서 발레를 본다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지만, 사실 제 맘 속엔 볼쇼이 외에 다른 발레단들도 이런 프로젝트를 만들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글의 초반부에서 밝혔다시피 순회공연은 지극히 제약이 따르잖아요. 특히 제가 살고 있는 밴쿠버처럼 규모도 작고 문화가 취약한 도시의 경우, 해외의 발레단이 순회공연을 오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사실 큰 도시라 해도 세계 탑 발레단이 늘 방문하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발레 댄서는 다른 분야에 비해 수명도 짧은 편이니, 영화관에서 발레를 상영한다는 것은 새로운 공연 포맷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솔직히 말해서, 저는 스크린에서 본 발레가 영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극장에서 박수를 치는 사람들을 보고 생각을 달리 했어요. 관객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면 이런 형태의 공연도 존재 가치가 충분한 것이니까요. 아울러 박수를 치는 관객 중에 발레 티켓을 살 여력이 안 되는 사람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또한 했습니다. 발레가 한정된 사람들이 즐기는 예술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데에는, 비싼 티켓도 큰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관객들이 행복할 수만 있다면 더 많은 도시의 극장에서 발레가 상영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는 시대와도 잘 맞아떨어지는 프로젝트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에디팅의 시대라는 현대에는 다른 형태의 창작물이 합쳐지는 게 자연스러운 현상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