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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마킴 Mar 30. 2018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통해서 본 부모 역할

그 문화적 배경에 대해서

영화 <Call Me by Your Name>을 보면 아스라한 첫사랑의 기억을 떠올린다고 합니다. 파스텔 톤의 예쁜 화면, 존재 자체가 미장센이 되는 아미 해머(Armie Hammer), 다른 배우로 대체 불가능할 것 같은 티모시 샬라메(Timothee Chalamet)의 연기, 고급진 연출과 음악 등이 관객의 개인적 추억을 건드리는 것 같아요. 그것도 아주 세련된 감각으로 말이죠. 사실 이 영화는 동성애의 사랑을 다룬 퀴어 영화이지만, 열일곱 소년의 성장통을 보여주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젊은이들에겐 본인들이 얼마 전에 치른, 그리고 기성세대들에겐 내 아이들이 겪고 있는 통과의례에 대한 단상을 제공하는 것이지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소재인 ‘첫사랑’으로 관객의 가슴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 겁니다.



저는 이 영화를 두 번 봤습니다. 처음엔 역시 동성애를 다룬 <가장 따뜻한 색, 블루>와 비슷한 영화일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봤으며, 두 번째는 퀴어 영화라는 선입관을 버리고 봤습니다. 그랬더니 영화를 보는 제 시각이 각기 다르더군요. 처음 영화를 관람했을 땐, 철저히 주인공에 동화됐습니다. 그의 아픔과 상실감에 같이 고통스러워했어요. 그런데 다시 봤을 땐 부모의 입장에서 영화를 보게 되더군요. 특히 제가 주목한 사람은 주인공인 엘리오의 아빠였습니다. 영화 속에서 그는 매우 가정적이며, 부와 사회적 지위까지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이상적 인물이었습니다. 모든 아빠들의 롤 모델이 될만한 사람이었죠. 그런데 그럼에도 지나치게 쿨한 그의 부모 역할에는 좀 의문이 가더군요. 부모의 유형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아이에게 무한한 도움을 주는 헬리콥터형과 강압적인 양육스타일을 지닌 교관형, 그리고 자녀 스스로 문제 해결을 하게 하는 컨설턴트형. 이 세 가지 중 엘리오의 아빠는 철저한 컨설턴트형 부모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이가 꽃길만 걷기를 바라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오히려 아이가 고통과 열정을 스스로 치유하고 불태우며, 삶의 맷집을 키워가길 원했죠. 그래서 아들로 하여금 성장하며 겪게 되는 고통을 스스로 앓아서 이겨내게 했습니다. 심지어 성적 취향의 결정권을 아이에게 맡기고, 방황하는 아이를 옆에서 지켜보는 방식을 취하더군요. 이런 교육 방법은 쿨해 보이지만, 사실 한국 정서에선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지요. 그렇지만 캐나다에서 두 아이를 키우고, 적지 않은 세월을 살아온 제 경험을 비춰보면, 이런 유형의 부모는 분명히 북미에 존재합니다. 그래서 제 외국 생활을 밑천으로, 영화 속 아빠가 어떻게 저런 양육방법으로 아이를 키울 수 있었는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그 결과, 답은 우리와 다른 이들의 문화에 있었습니다.


북미인 들은 남의 영역을 침범하거나 몸을 부딪치는 것을 극도로 삼갑니다. 소금이나 후추도 건네 달라 부탁하고, 음식도 덜어서 내 영역 안에서 먹습니다. 우리처럼 팔과 젓가락을 부딪쳐가며 반찬 다툼하는 일은 없다고 봐야겠죠. 그리고 이곳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절대 상대의 몸에 손을 대지 말라 교육받습니다. 물건을 집을 때도 친구 몸 앞으로 팔을 내밀지 말고 건네 달라고 하라 가르치며, 아무리 화가 나도 사람을 치거나 미는 행위 또한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기 교실에서는 누가 자기를 밀었다고 고자질하는 소리가 자주 들립니다. 선생님은 그런 행위를 고자질로 규정짓지 않고, 신고정신으로 여길뿐이고요. 즉, 북미의 교실에서 고자질해서 혼나는 아이는 거의 없습니다. 남의 몸에 손을 대서 벌 받는 아이만이 있을 뿐이지요. 그렇다면, 이들은 왜 자신의 몸을 지극히 아끼고 또, 사릴까요? 그건 바로 몸에 관한 의식 구조가 우리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신체 발부는 수지 부모’라는 의식의 지배를 받아온 우리와 달리, 이들은 자신의 몸에 대해 주인의식이 강합니다. 부모도 아이를 함부로 때릴 수 없고, 학교에서의 체벌은 상상할 수 조차 없습니다. 즉 이들에게 내 몸의 주인은 나입니다. 따라서 북미에서는 만 16세가 넘으면, 아이들의 성생활에 대해 부모가 왈가왈부할 수가 없습니다. 한 예로 아이가 피임약을 처방받았다는 사실을 약사가 부모에게 알려주면, 징계를 받게 됩니다.(이곳 약사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이는 신체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이자, 고객의 사생활 정보를 노출한 것이니까요.


이런 문화를 이해하고 보면,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 나오는 아빠의 태도를 바라보기가 좀 수월해집니다. 주인공인 엘리오는 여자 친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에게 강렬한 성적 욕망을 느껴 아픈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아빠는 아들의 사생활에 전혀 개입하지 않거든요. 단지 슬픔에 대처하는 방법과, 앞으로 살아갈 일에 대한 조언을 해 줄 뿐이었지요. 그리고 아들의 성적 취향에 대해 자신의 판단을 주입하려 하지도 않았어요. 아빠는 자신의 뜻대로 아이가 따라주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스스로 내린 결정에 행복하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제가 같은 상황에 놓였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일단 놀란 마음에 목소리를 백 데시벨로 올리고, 에이즈를 운운할 것 같습니다. 여자를 한 번 만나보라고 푸시할 것도 같고요. 이렇게 하면 아이의 취향이 극적으로 바뀔 것이라는 희망을 품으면서 말입니다. 저와 달리 너그럽고 평화로운 성격을 가진 남편의 경우 또한 생각해봤습니다만, 아무리 상상해도 엘리오의 아빠처럼 쿨한 모습은 도저히 연상되지 않더군요. 우리는 어쩔 수 없는 한국 부모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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