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급의 의미 진화에 대해서
B급이란 단어의 의미를 주변인들에게 물어봤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급하다, 질이 낮다, 유명하지 않다”라고 답을 하더군요. 그렇지만 반면에 “다르다, 비주류, 시대를 앞서 가 있다, 재미있다”라는 견해를 밝히는 사람들 또한 있었습니다. 이 결과를 보면 우리는 B급이라는 말 자체는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만, 동시에 긍정적 의미의 변화 또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요즘은 B급이라고 해서 반드시 질이 떨어진다거나, 감각이 딸린다고 생각하진 않는 것 같습니다. 소위 B급이라 분류되는 창작물들이 고급스럽지 않다는 이유로 평가절하되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고 독특하다고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거든요. 과거와 달리 말이죠.
1960년 대에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한 벨벳 언더그라운드(The Velvet Underground)라는 밴드가 있습니다. 당시는 엔 비틀스, 롤링 스톤즈, 더 후, 야드버즈 등의 기라성 같은 밴드들이 활동하던 시대였는데,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음악을 추구합니다. 사이키델릭, 하드록, 또는 블루스를 기반으로 한 록이 당시의 주류 음악이었으나, 그들은 단순하고 거칠며 약간 어설픈듯한 사운드를 구사한 것이지요. 사실 저는 이런 점을 매력으로 보지만, 과거 그들은 연주하던 클럽에서 쫓겨나기 일수였던 B급 밴드였습니다. 후일 ‘인디 록의 효시’라는 찬사와 함께 인기를 얻게 된 것을 보면, 그들의 음악은 시대를 너무 앞서 갔음이 분명합니다.
쥐구멍(이 표현이 딱 맞을 듯합니다. 그들은 돈에 쪼들렸습니다.)에도 볕 들 날이 정말 있는가 봅니다. 한 거물이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음악에 홀딱 반하는 대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이 외면받던 그들의 마이너함에 외려 주목했던 것이죠. 자신의 작업실을 팩토리라고 부르며, 대놓고 예술의 상업성을 지향한 그는 실험영화에도 도전했으나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때 자신의 기호에 딱 맞았던 밴드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영화에서 음악으로 관심을 돌리고, 이들을 키워주기로 작정합니다. 프로듀서를 자청한 앤디 워홀은 앨범 커버까지 직접 그리고, 밴드의 이름이 아닌 자신의 이름을 앨범에 적어 넣습니다. 앨범 커버가 자신의 작품임을 알림과 동시에, 무명 밴드에게 혜택을 받게 하려는 의도였지요.
그 유명한 앤디 워홀의 바나나입니다. 우리에게 그래픽 티셔츠로 익숙한 디자인이지요. 그런데 이 작품으로 인해 대중은 그들에게 더욱 등을 돌리게 됩니다. 그 이유는 아래의 사진에 잘 나와있습니다.
노골적으로 남자의 생식기를 연상시키는 저 디자인은 지금 봐도 무척 외설스럽지 않습니까? 그러니 1967년에는 그 충격이 더 했고, 대중의 심기를 건드려 저질 시비가 일게 된 것이지요. 그도 그럴 것이 바나나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벗기면 핑크빛 속살이 보이도록 스티커로 제작 됐거든요. 천천히 벗겨 보라는 친절한 문구까지 바나나 상단부에 적어 주셨고요.
저는 앤디옹께서 앨범 제작 당시, B급 스피릿으로 충만하신 상태가 아녔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B급의 의미를 시대를 앞서 가 있는 것이라고 볼 때 말이죠. 아무튼 이 앨범은 혹독한 비난 끝에 판매중지가 되고 맙니다. 불쾌하다는 이유로 라디오에서 음악을 틀어주지 않았으니, 폭망해버린 것이지요. 어쩔 수 없이 앤디 워홀은 저 문제적 바나나를 평범한 형태로 다시 제작합니다만, 끝내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음악과 앨범은 먼 훗날 다시 재조명받게 됩니다. 50년 뒤에 외설 시비를 일으켰던 앨범은 다시 출시됐고, 현존하고 있는 1967년의 오리지널 앨범이 고가에 거래되고 있는 걸 보면, 앤디 워홀과 벨벳 언더그라운드 모두 너무 늦게 인정받았네요.
쿠엔틴 타란티노(Quentin Tarantino)를 빼놓고 B급 얘기를 할 순 없겠지요. 대놓고 B급임을 드러내고, 기시감과 과장, 적나라함으로 가득 찬 영화를 만드시는 분. 예술에 있어서 오리지널리티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그의 작품은 홍콩, 일본, 그리고 과거 할리우드과 프랑스 영화들에서 본듯한 장면들이 버젓이 재현되곤 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완성된 작품들은 ‘쿠엔틴 타란티노 표 영화’가 돼 버린다는 점이 대단하죠. 그의 영화는 줄곳 B급 딱지를 달아 왔는데, 네거티브 한 의미로서가 아닌 독창적이고 특별하다는 평이 대부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영화 속 인물들이 갱, 마약범, 살인자들 내지는 똘끼 터지는 비호감 캐릭터가 대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그래서 그의 영화를 일컬어 ‘B급 정서로 A급 재미를 준다’고 하나 봅니다.
사실 그는 태생 또한 하이 클래스가 아녔습니다. 좋은 머리에도 불구, 공부에 흥미가 없어, 하이스쿨을 중퇴한 그는 비디오 샵 점원으로 일을 합니다. 영화 오타쿠였던 그는 비디오 샵에서 영화를 맘껏 보고, 고객들과 대화를 하며 자신의 콘텐츠를 채워갔던 거죠. 게다가 그는 어려서부터 스스로 영화를 만들곤 했다 하니, 오늘날 그의 성공은 영화 덕질의 승리라고 봐도 좋을 겁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영화를 관통하는 것은 B급 정서와 노골적인 오마쥬 장면들인데, 오늘날 관객들은 바로 그 부분에 열광합니다. 호불호가 있기는 하나, 부정적 의미로서 B급으로 그의 영화를 평가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제 경우, 지나친 잔인함 때문에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를 좋아하진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잔인함을 저질스러움과 동일시하진 않아요. 사실 저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관객들은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를 가벼움이 아닌 통쾌함, 저질이 아닌 독특함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을 보면 소위 B급 작품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에 변화가 온 것이 분명한 듯합니다. 더불어 그 의미도 변질돼 가고 있고요. 우린 앞으로 ‘B급’이란 단어를 접하게 되면, 질이 낮거나 뭔가 부족하다는 의미에 앞서, 흥미롭고 색다른 무엇을 연상하게 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겐 영화 <접속>의 OST로 알려져 있는 곡. The Velvet Underground의 <Pale Blue Eyes>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