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혼자서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를 보고 왔다. 사실 오래전부터 상당히 궁금해하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무슨 연유에서인지 미루고 미루다가 곧 막이 내린다는 사실에 새삼 깜짝 놀라 서둘러 예매하기에 이르렀다.
1월 한 달간 새해의 시작과 함께 남들은 그 어느 때보다 의욕이 넘치는 때인데, 나는 정신적으로 오히려 방전되었단 느낌이 들어 사실 조금은 마음이 가라앉은 시간을 보냈다. 공연 관람은 어떻게든 놓칠 수 없는 가장 소중한 나만의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살짝 예매를 취소할까 망설이기까지 했으나, 이 멋진 작품을 그렇게 어이없는 이유로 놓쳐버렸더라면 다음 무대에서 만날 수 있을 때까지 상당 기간 후회를 안고 지낼뻔했다.
이 시대 최고의 뮤지컬이라는 찬사를 받는 작품이다. 숱하게 뮤지컬을 보러 다니지만 과연 어떤 이유에서 그런 평가를 받는지가 정말 궁금하긴 했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는 2000년도에 개봉되었던 영화를 바탕으로 제작되어 2005년에 초연되었는데, 영화는 실제 영국 로열 발레단의 무용수인 필립 모슬리의 실화를 참조하여 제작됐다고 한다. 실제 그의 이야기가 그대로 옮겨진 것은 아니고, 빌리 엘리어트의 각본가인 Lee Hall에 따르면 1944년 더럼 지역에서 태어난 영국의 오페라 바리톤, 토마스 앨런 경의 인생에서 영감을 받았다고도 한다.
뮤지컬은 영국 웨스트엔드 초연 이후 뉴욕 브로드웨이, 시카고, 호주 시드니를 거쳐 세계 각국에서 큰 흥행을 거뒀는데, 무엇보다 주목할만한 점은 이 작품의 음악 작업을 명불허전의 팝 뮤지션 엘튼 존이 했다는 사실이다.
빌리 엘리어트의 이야기는 마거릿 대처 수상 집권 시절인 1984년 영국 북부 탄광촌 더럼(Durham)에서 시작된다. 당시 더럼에서는 정부 시책에 반대하는 탄광 노동자들의 파업이 한창이었는데, 11세 소년 빌리의 아버지와 형도 탄광의 노동자들이다. 38세 젊은 나이에 엄마는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 형 그리고 치매에 걸린 할머니와 허름한 집에서 살고 있는 빌리는 당시 시대상에 걸맞은 '강한 남자'가 되기 위해 아버지의 뜻에 따라 체육관에서 권투를 배우게 된다. 그러다 체육관 귀퉁이에서 열리는 발레 교실을 보며 빌리는 마음이 끌리게 되고, 발레를 지도하는 윌킨슨 부인이 그의 재능을 발견하게 되면서,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국 빌리가 로열 발레 학교까지 입성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11세 소년이 주인공이다 보니 어린이 출연자들이 대거 등장한다. 관람 가능 연령도 8세 이상으로 기준이 잡혀서인지 그 또래 아이들 손잡고 온 부모들이 정말 많았다. 여태 뮤지컬 보러 다니며 본 중 아이들 관객이 가장 많았던 듯하다. 다만, 작품 자체는 소년이 주인공이지만 실제 아이들이 볼만한 작품인지에 대해서는 나는 조금 반대의 입장에 선다. 탄광 노동자들의 이야기이다 보니 극의 전반에 담배 피우는 장면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사실상 거친 욕설이 대사의 반 이상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렇다고 해서 작품 전체가 불량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극의 전개와 당시 배경의 현실적 표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들이지만 작품 전반의 스토리 전개와 갈등 상황을 8세 또래 아이들이 이해하기엔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공연 시작 전 이 부분에 대해 친절하게 주의 사항을 방송하는데, 사실 이런 요소들을 아이들에게 노출시켜줄지 아닐지에 대해서는 각자 부모들의 선택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쨌든 딸아이가 관람 가능 연령에 딱 걸려 있지만 좀 더 자라면 보여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무대에 등장하는 담배는 실제 담배가 아니라 대체 제라고 하던데, 아무리 공조 시스템으로 빠른 환기를 시킨다지만 그래도 코를 찌르는 연기 냄새는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한다는 점은 미리 알고 가면 좋을 듯하다.
이 작품에 빌리로 캐스팅되기 위해서는 상당히 까다로운 조건을 갖추고 오디션을 거쳐야만 가능하다. 아직 변성기가 지나지 않은 150cm 이하의 소년들이어야 하고, 무려 2년에 가까운 빌리 스쿨 트레이닝 과정을 거쳐야만 무대에 서게 된다고 한다. 실제 이들의 트레이닝 과정에 대해 영상을 통해 봤는데, 매일 이어지는 각종 춤 교습과 연기 수업 등에 번아웃을 경험한 아이들도 있다 하니 그 무대 위에 선 빌리 역할의 배우들을 보며 그저 대단하다는 생각뿐이었다.
이 작품의 전체 묘미라 한다면 그야말로 탭댄스와 현란한 아크로바틱 동작 들일 텐데, 어찌나 잘 해내는지 무대를 지켜보는 내내 더더욱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약간은 내 아이를 바라보는 듯한 짠한 마음도 느껴졌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연습을 통해 자신과의 싸움을 이겨냈을지 그저 기특하고 안쓰러운 그런 마음이 좀 들었다. 특히나 백조의 호수 음악에 맞춰 등장하는 빌리와 성인 빌리(상상)의 발레 장면은 그야말로 감동 그 자체인데, 이때 등장하는 와이어 신이 정말 대단하다. 허리에 매인 와이어 한 줄에 의지해 허공을 회전하며 무대를 휘젓는 빌리의 모습은 그저 울컥울컥 감동의 눈물을 자아내고 말았다.
이미지 출처: 에너지 코리아 뉴스
무엇보다 전체 작품 중 그야말로 약방의 감초 역할이라 한다면 바로 치매에 걸린 빌리의 할머니일 텐데, TV 드라마에서 가끔 뵈었던 박정자 배우님께서 이날의 캐스팅이셨다. 역할 자체가 상당히 귀여우시단 생각이 많이 들었는데, 그 연세에도 여전히 무대 위에서 반짝반짝 빛이 나시는구나 싶은 생각에 존경의 마음이 컸다.
윌킨슨 부인 역할의 김영주 배우님은 지난해 몬테 크리스토에서 걸 크러시의 진수를 보여 주시더니, 이번 빌리 엘리에트에서 윌킨슨 부인으로서 보여주신 츤데레 스타일 역시 그녀에게는 '착붙'이었다. 약간의 허스키한 음성에서 무심한 듯 베어 나오는 따스한 마음이 어찌나 멋지게 감동을 안겨 주셨는지 모른다.
탄광의 노동자들은 1년여의 치열한 시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지만, 빌리는 그런 가운데 결국 로열 발레 학교로 향하며 그저 '희망'을 남기고 작품은 마무리가 된다. 이때 탄광으로 돌아가는 아버지와 노동자들이 학교로 떠나는 빌리를 향해 빛을 비추는데, 일반 조명이 아니라 광부들의 안전모에 달린 플래시들이 빌리를 향하고 있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먹먹해지는 기분이었다.
이미지 출처: 신시 컴퍼니 인스타그램
참 좋은 작품이었다. 처음 공연이 시작됐을 때, 일반적으로 처음부터 화려한 볼거리들을 쏟아내는 다른 뮤지컬 작품들과는 달리 극의 전개가 다소 지루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진행이 되어 갈수록 끊임없이 이어지는 재미와 감동은 쉴 틈 없이 무대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몇 년 후에나 다시 무대로 돌아올지 모르겠지만 언제가 됐건 간에 반드시 다시 만나야 할 이 시대 최고의 뮤지컬임은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