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낙 혼자서 뮤지컬 공연 보러 다니는 것이 나만의 오티움이 된 지 오래지만, 나의 버킷 리스트에는 작은 소망이 하나 담겨 있었다. 바로 딸아이가 자라면 함께 공연장에 다니고 싶다는 바람이었다. 올해 학교에 들어가는 꼬마가 여덟 살에 입성함으로써 당당히 공연장 문턱을 넘을 수 있는 나이가 된 터에, 마침 뮤지컬 라이온 킹의 인터내셔널 투어가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진행 중에 있는지라 너무도 추웠던 수요일 낮 꼬마의 손을 잡고 함께 오페라 극장을 찾았다.
사실 처음에는 이 공연을 보러 갈지 말지에 대해 고민이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전 세계적으로 흥행을 이끌어낸 이 작품이 유일무이하게 참패의 고배를 마신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기 때문이다. 뭔가 한국인들의 정서와 맞지 않는 건가 싶은 의문이 들기도 했고, 워낙 뮤지컬을 있는 대로 다 찾아다니다 보니 주머니 사정도 고려해야 했던지라 나름의 선별 작업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진정한 선망의 대상이던 디즈니 시어트리컬의 프로덕션인 데다 왜 초연 당시 흥행하지 못했는지를 직접 보고 판단해보고 싶었다. 더구나 인터내셔널 투어의 찬스를 잡지 않으면 딱히 만나볼 기회가 없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사실상 꼭 봐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다.
이 작품의 아픈 역사는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국내에 등장한 첫 뮤지컬 전용 극장, 샤롯데시어터의 개관작으로 바로 라이온 킹이 선정되었는데, 문제는 디즈니로부터 아시아 판권을 따낸 일본 최대의 극단 '시키'에서 제작을 맞았다는 점이다. 일본 뮤지컬 무대에서도 활동 중이던 한국 배우들을 기용해서 '오픈런'으로 막을 올렸으나 당시 대중들의 반응은 상당히 싸늘했다고 전해진다. 뮤지컬 시장이 지금은 많이 성장했지만, 당시만 해도 이런 가족 뮤지컬 장르가 그다지 대중의 반향을 얻지 못했고, 여느 국내 뮤지컬 작품들처럼 '스타 배우'가 등장하지 않았으며 티켓 가격이 무리하게 높다는 논란이 일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일본 대형 제작사의 국내 진출에 대한 업계 관계자들의 반발이 대단히 거셌다는 후문이다.
※ 오픈런- 기간을 정해두지 않고 계속해서 공연하는 것으로 브로드웨이는 오픈런으로 올리는 작품이 많다
반응이 생각에 미치지 못하자 결국 1년만 공연하기로 결정하게 되었고, 그 기간 동안 약 330여 회의 공연에 총 제작비 177억 원을 들이고 총수입 140억 7천만 원을 기록함으로써 36억 원의 적자를 기록했다고 한다.
사실상 참패의 원인이란 작품 자체의 미흡함이라기보다 당시의 상황이 엮어낸 비운이라 할 수 있겠다. 그 이후로 한국에서는 개별 프로덕션이 올라가지 않는 중이고, 이와 같이 오리지널 팀의 인터내셔널 투어를 통해서만 만나볼 수 있는 작품이 되었다고 한다.
국내에서 푸대접을 받았던 그 '라이온 킹'이 이렇게 인터내셔널 투어로만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 솔직히 나는 좀 더 쾌재를 부르는 입장에 선다. 왜냐하면, 라이온 킹의 배경이 아프리카 정글이다 보니 사실상 배우들 중 대략 80%가량은 흑인들이 기용된 상태였다. 원래 나라마다 민족마다 언어에 따라 말이 나오는 발성이 모두 제각각이라 그 나라 특유의 '음성'을 내는 것이 일반적인데, 더불어 노래를 부를 때 나오는 소리도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듣는 귀가 예민하신 분들은 아마 금방 알아차리실 텐데, 흑인들과 백인들이 내는 노랫소리도 상당히 다르다. 분명 흑인들만이 보유한 소울 넘치는 음성이 존재한다.
나는 그런 요소가 이 작품에서 아주 큰 역할을 감당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무파사(심바의 아빠) 역할을 맡은 배우님은 정말 베이스 우퍼를 본인 몸에 장착했나 착각이 들 만큼 웅장한 베이스 사운드를 내주셔서 대사를 칠 때나 노래를 부를 때 내심 깜짝 놀랐다.
내 생각에는 만약 이 작품을 한국 배우들이 맡는다면, 그런 느낌을 절대 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건 한국 배우들의 자질 부족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그저 민족 특성상 우리가 낼 수 없는 그들 고유 컬러가 있다는 뜻이다.
이런 오리지널 팀 내한 공연을 보며 느낀 재미있는 점은, 지난번 '노트르담 드 파리'같은 경우는 프랑스인들이 불어로 부르는 샹송이었는데, 이렇게 미국인들이 영어로 부르는 분위기와는 또 완전히 다르다는 점을 발견하여 상당히 흥미롭게 느껴졌다. 확실히 나라별로 낼 수 있는 음색과 느낌은 각양각색임이 분명하다.
음악은 팝의 거장 '엘튼 존'의 작품이니 만큼 그 어느 것 하나 뺄 것 없이 주옥같았지만, 여러 넘버에 적용된 아프리칸 에스닉(ethnic) 음악 스타일이 내 귀를 사로잡았다. 개인적으로 아프리카 음악에 많이 등장하는 '화음'에 매료되어 그곳 민속 음악을 참 좋아하는데, 라이온 킹에는 분명 아프리카 적 느낌이 다양하게 요소요소에 적용되어있었다. 특히, 오케스트라 피트에 들어가지 않고 관객석 양 측면 끝 발코니 석에 퍼커션(percussion-타악기) 주자들이 들어가 있어서, 2층 1열에 앉았던 나는 다양한 아프리카 타악기들의 등장과 그들의 신나는 연주를 함께 볼 수 있었다는 점이 참으로 흥미로웠다.
이 작품에서 또 한 가지 극찬을 해야 할 부분은 바로 '의상'이다. 동물 의상과 배우가 그야말로 혼연일치가 되어 그 섬세한 움직임들을 배우가 모두 묘사하고, 몸에 장착한 동물 탈들이 그 움직임을 그대로 모사하게끔 제작되었다는 자체가 상당히 놀라웠다. 게다가 조명 워크를 이용한 그림자 활용이라던가, 물가에서 심바에게 무파사의 모습이 나타나던 장면은 도대체 어떻게 저런 광경을 자아냈을까 아무리 봐도 모르겠지만 너무도 신기한 장관이었다. 그래픽과 무대 소품, 그리고 조명의 3박자가 이루어낸 진정한 예술이었다. 뿐만 아니라, 중간중간 한국어 드립이 다양하게 등장해 예상치 않는 스폿에서 웃음을 자아내는 즐거움이 많이 존재했다.
어떤 작품이든 그 작품만이 주는 고유의 감동 포인트가 존재하고 다들 '볼만한' 부분들이 있지만, 매번 느끼게 되는 점은 분명 있다. 역시 천조국의 뮤지컬은 스케일이 남다르구나 하는 점이다. 지난해 '비틀쥬스'를 보면서도 느꼈던 바인데, 뭔가 그들에게 있어 공연의 최우선 핵심을 '관객'에게 두었구나 싶을 정도로 대체적으로 관객을 무대로 끌어들이는 요소들이 상당히 많이 존재했다. 미국 뮤지컬 작품들의 특성이 아닌가 싶다.
사실 코로나를 겪어 오며 그 누구보다도 무대 위의 아티스트들은 '관객'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지를 뼛속까지 경험해야 했을게다. 라이온 킹을 관람하는 내내 나 역시도 그 안의 중요한 일원임을 분명하게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었단 생각이 든다.
내가 한국에 없었던 2006년도의 상황을 알 길은 없지만, 솔직히 전반적인 상황에 떠밀려 빛을 발하지 못했다 해도 왜 그렇게까지 흥행에 참패했는지 의아할 만큼 너무도 훌륭한 작품이다. 흥이 넘치던 지휘자님의 뒷모습, 열정을 다해 즐겁게 연기하던 배우들의 모습, 화려함으로 다 표현 못할 무대 위의 볼거리들 모두 놓치기엔 너무 아깝다. 가능하다면 이번 인터내셔널 투어의 찬스는 꽉 잡아보면 좋지 않을까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