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왕의 이야기는 어릴 적 그저 만화로 접해본 원탁의 기사 정도로 밖에는 아는 바가 사실 없었다. 그러다 딸아이에게 읽어준 '아서왕 이야기'를 통해 그가 바위에 꽂힌 엑스칼리버 검을 뽑아 왕이 될 운명을 받아들였다는 영웅의 스토리라는 것 외에는 사실 잘 알지 못했다. 찾아보니 아서왕은 고대 브리튼 지역에 전해져 오는 전설의 인물이라고 한다. 그런 아서왕의 이야기를 담은 뮤지컬 엑스칼리버가 지난해 말 한창 막을 올렸었는데, 벼르기만 하다 놓쳐버린 걸 1월 말부터 세종문화회관에서 6주간의 앙코르 공연이 진행중이다. 아쉬웠던 차에 잘됐다며 바로 표를 예매했건만, 코로나로 인해 한번 취소를 당하고 그래도 놓치지 말자 싶어 다시금 예매를 했다.
뮤지컬은 크게 오리지널 공연, 라이선스 공연, 창작 뮤지컬 이렇게 분류할 수 있다. 간략히 살펴보자면 오리지널이란 그야말로 해외 오리지널 팀이 국내에 들어와 공연하는 것이고, 라이선스 공연이란 해외의 작품을 라이선스 계약을 통해 들여와 해외 프로덕션 그대로를 국내 배우들이 출연하여 올려지는 작품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창작 뮤지컬이란 말 그대로 국내에서 창작된 작품을 일컫는다. 새삼 이 뮤지컬 공연의 종류를 꺼내 든 이유는 바로 이 '엑스칼리버'가 창작 뮤지컬이기 때문이다. 호기심이 일었다. 국내 창작 뮤지컬이라 한다면 왠지 한국만의 색깔을 담은 '명성황후'같은 작품만 떠올렸을 뿐, 전혀 연결점을 찾을 길이 없는 남의 나라 전설이 국내 작품에서 창작의 소재가 된다는 부분이 상당히 독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 작품의 음악은 명실상부 당대 최고의 뮤지컬 작곡가인 '프랭크 와일드혼'의 손에서 탄생했다. 어떻게 국내 창작 뮤지컬에 프랭크 와일드혼이 등장하는지 그 내막이 상당히 궁금해졌다.
이 작품이 창작 뮤지컬이라 불리는 이유는 찾아보니 다음과 같다. 원래 2014년 스위스의 세인트 갈렌 극장에서 '아더-엑스칼리버 <Arthur-Excalibur>'라는 타이틀로 선보인 후 개발 중에 있던 작품인데, 국내 뮤지컬 제작사인 EMK에서 월드 와이드 공연 판권을 확보해 들여왔다고 한다. 그리고는 '엑스칼리버'라 제목을 변경하고 스토리를 대폭 수정하여 2019년 국내 무대에서 초연을 올렸다고 한다. 그러니 엄밀하게 따지고 보자면 이 작품이 순수히 한국인 아티스트들의 손에서 탄생한 순수 창작 뮤지컬이라 볼 수 있을지는 사실상 애매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해 읽었던 최민우 기자님의 '뮤지컬 사회학' 중에도 국내 창작 뮤지컬의 실태에 대해 다양한 지적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솔직하게 나는 공감하지 못했었다. 뮤지컬이란 장르 자체가 한국 고유의 것이 아니다 보니, 창작 뮤지컬의 부진을 논하는 것은 마치 미국인들이 왜 '창'을 잘 못하냐며 타박을 주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도 관람할 작품을 선택할 때의 기준이란, 익히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라이선스 작품이 아니고서야 굳이 보러 갈 생각을 안 했었다. 사실상 창작 작품에 대한 신뢰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순수 창작이냐 아니냐에 대한 왈가왈부는 차치하고, 일단 국내에서 다양하게 콘텐츠를 확장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자체만으로는 충분히 긍정적으로 평가해볼 만한 일이다. 솔직하게 얼마 전 관람했던 순수 국내 창작 뮤지컬인 '프랑켄슈타인'은 너무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반면, 이번 엑스칼리버는 상당히 만족도가 높았다. 스토리 자체는 '아서'라는 한 사람의 단순한 성공 스토리라기보다는, 그가 어떻게 왕이 될 운명을 타고났으며 그 운명을 받아들여 왕이 됨으로 인해 겪게 되는 한 인간으로서의 '고뇌'에 더 집중하는 스토리였다. 그저 멋지게 원탁의 기사를 거느리며 앵글로 색슨족의 침략에 맞서 영토를 지키고 승승장구했다는 멋진 리더의 모습보다는, 키워준 아버지의 죽음에 좌절하고 굳건한 리더로서의 면모보다는 인간으로서 흔들리는 나약함이 부각되었다.
결국 그래서 그는 승리를 얻은 대신 많은 사람을 잃었고, 아내 기네비어마저도 그를 떠난다. 애초 알려졌던 시놉시스에는 기네비어가 아서의 절친 랜슬롯과 부정을 저질러 둘이 쫓겨났다가 이후 위험에 빠진 아서를 기네비어가 나타나 구해주고 결국 두 사람은 화해하는 결말로 알고 있었는데, 시놉시스에 수정이 들어간 건지 관람한 내용은 다소 차이가 있었다.
여하 간에 음악을 들으며 느낀 것은, 역시 프랭크 와일드혼의 '공식'을 잘 따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어느 것도 귀에 하나 거슬리지 않는 매끈한 음악의 전개와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빠른 장면의 전환으로 한시도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었고, 중세 영국의 감성을 담뿍 가져온 북소리와 피리 사운드가 아주 특징적이었다고 생각된다. 다소 아쉬웠던 점이라 한다면, 웅장한 북소리가 주는 울림은 대단했는데 사운드 발란스 조절에 실패(?)한 건지, 가끔 배우들의 노랫소리가 파묻히는 부분들이 종종 있었다. 덕분에 가사가 안 들려 내용을 놓치는 부분들이 발생했다. 공연 전에 관객석 곳곳에 앉아 발란스 체크를 안 해보는 걸까. 국내에선 사전에 어떻게 사운드 체크를 하는지 좀 궁금해진다.
여전히 엄청난 팬덤을 끌어들이는 김준수 배우님은 실제 라이브 공연을 통해 들으니 생각보다 성량이 큰 편이었는데 무엇보다 연기를 귀엽게 한단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전문 성악 베이스의 소리를 더 선호하는지라 멀린 역할의 손준호 배우님과 모르가나 역의 신영숙 배우님의 소리는 뭐라 말할 것 없이 멋지다 느껴졌고, 대신 케이팝 베이스의 김준수 배우님, 이지훈 배우님, 케이(러블리즈 멤버) 님의 소리는 대중음악의 컬러가 진하게 느껴지는 대신 사운드가 풍성하지는 않았지만 세 사람 간의 앙상블 케미에는 발란스가 딱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전한 국내 창작 뮤지컬이라 보기엔 다소 애매함이 있지만, 여하 간에 창작 뮤지컬 장르에선 단연코 상당히 훌륭한 작품임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다. 단 한 번에 귀를 사로잡을 정도의 넘버는 크게 눈에 띄지는 않았으나 작품 전반에 걸쳐 펼쳐진 음악의 구성과 퀄리티가 무척 훌륭하고, 더불어 스토리 라인도 그다지 모난 곳 없이 잘 짜였단 생각이 들었다. 맥락 없이 극을 짜냈다는 느낌도 없어서 상당히 만족스러운 관람이 되었다.
마지막 공연일까지 날짜가 얼마 남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뮤지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눈과 귀로 직접 담아봐도 좋을만한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