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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마뮤 Mar 21. 2022

힘들어도 가는 게 여행이지..

행복한 홍콩 고행기

육아를 해본 부모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요즘은 집에서의 생활이 늘어나면서 돌아서면 밥을 해야 한다며 '돌밥'이란 말이 유행처럼 떠다녔지만, 어린 아기를 키우는 24시간이란 돌아서면 우유 먹일 시간, 돌아서면 기저귀 갈아줄 타임.. 똑같은 일의 무한 반복 루틴이 매일매일 이어다.


그때 가장 바랐던 것은 단 한 가지였던 것 같다. 그저 어디로든 떠나고 싶다는 마음. 어디든 한가로이 혼자 훌쩍 떠나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가만히 누워있고 싶다는 게 간절한 소원 아닌 소원이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아이를 아기띠에 짊어지면 웬만하니 어디든 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붙었을 무렵부터 슬슬 여행의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제일 처음엔 소심하게 서울 시내 1박 호캉스, 그게 되니 다음은 속초, 그러다 아이가 18개월쯤 됐을 때 자신감이 하늘을 찔러 결국 비행기를 탔다. 홍콩에 사는 친정 오라비 방문을 감행한 것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은 진리! 알면 감히 못할 일이기에..)


지금 돌이켜보면 그게 얼마나 무모했나 싶지만, 아이의 이유식을 꽁꽁 얼려 아이스박스에 담아 들고, 기저귀 한 무더기가 트렁크의 한 면을 점령했으며, 아무리 휴대용이라지만 그래도 15kg을 감내해야 하는 휴대용 유모차에 필살의 아기띠까지... 그게 과연 여행가방인지 이민가방인지 알 길이 없는 짐을 챙겨 들고 그렇게 비행기에 올랐다.




매일 똑같은 일상을 벗어났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은 엄청나게 들떠있었다. 아이를 낳고 해외로 떠나는 건 처음이었기에, 비행기에 오른다는 자체로 느꼈던 그 신남은 무엇에도 비할 것이 없었다.

그런데, 도착 후 나의 여행이란 과연 여행이긴 했을까. 홍콩 시내길은 유모차를 끌고 다니기엔 참으로 부적절했다. 그렇다 보니 나는 아이를 짊어지고, 남편은 유모차를 접어 짊어지고 고행길을 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때면 때마다 기저귀를 갈아줘야 하고, 심지어 모처럼 구경 중이던 샵 한 군데서 갑자기 코끝을 자극하는 구린 똥냄새에 화들짝 놀라 급히 찾아 들어간 화장실에 기저귀 교체 테이블이 없어 변기 뚜껑 위에 아이를 세워두고 뒤처리를 해주던 기억이란 지금 생각해도 으름듭기(어금니 꽉) 그지없다.


하루는 아이가 먹은 것이 얹혔는지 밤중에 자다 깨서는 침대 시트에 한바탕 토를 했다. 그러고 좀 진정이 돼서 겨우 잠을 재웠는데, 다음날 외출한다며 아기띠에 차고 택시를 탔더니 조금 있다 아이가 내 가슴팍에 또 먹은 것을 잔뜩 게워냈다. 나는 그 길로 쇼핑센터에 가서 새로 옷을 사 입어야만 했다. (나에게 홍콩에서의 쇼핑이란 그런 것이었다) 겁을 상실한 어미 아비의 여행 감행으로 어린것이 타지에서 고생하는구나 싶어 미안스럽기도 했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생각보다 아이 컨디션이 너무 멀쩡해서 걱정 없이(??) 여행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래도 홍콩에서 꼭 가봐야 한다는 빅토리아 피크에서 아이를 안고 외투로 둘둘 둘러싼 채 엄청난 바람을 맞으며 남긴 사진엔 멋진 야경과 묘하게 행복한(?) 웃는 얼굴들이 남아 있고, 생각보다 너무 작아 조금 실망스러웠던 디즈니랜드에서는 둥그렇게 눈뜨고 퍼레이드를 보며 좋아하던 아이의 모습이 영상 속에 남아있다.

그렇게 이민가방처럼 바리바리 살림을 챙겨 떠나 나는 현지에서 그저 아이 수발을 드느라 휴식은커녕 생 노동의 시간으로 피로를 더 쌓아 돌아왔었지만, 그럼에도 그 여행이 남겨준 좋은 '추억'만큼은 소중하게 나의 기억 속에 새겨져 있다.


여행은 사실 떠나기 전 계획하고 짐을 싸는 순간이 좀 더 많이 설레지 않나 싶다. 그나마 이제는 아이가 조금 자라 짐이 단출해져서 좀 나아졌다. 그래도 어딘가 가려면 가방을 꼼꼼히 챙기고 싸는 건 결국 모두 내 몫인 데다 여행지에서도 내 손이 모두 닿아야만 하는 일 투성이며, 돌아오면 세탁기를 몇 번씩 돌려가며 다시금 정리를 해야 하는 것도 모두 내 몫으로 남겨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제나 여행이 고프다. 그것이 고생이든 고행이든, 어쨌든 평범한 일상에 변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 그 순간들이 너무도 소중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기억은 참으로 희한하고 기특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좋았던 면만을 남겨놓는 경향이 있다. 그러게 여자들이 출산 후 다시는 아이를 낳지 않겠노라 선언을 하고서도 시간이 흐르면 모든 걸 까맣게 잊고 다시금 둘째 출산을 감행하지 않던가. 모두가 안 좋고 힘들었던 기억만을 되씹고 곱씹는다면 사실 세상이 원활히 돌아가긴 쉽지 않으리라. 아마도 그러기에 힘들었던 기억은 쉽사리 저장되지 않게끔 조물주가 우리의 기억력을 세팅해둔 것이 아닐까.


여행인지 고행인지 모를 '떠남' 후에는 분명 탈탈 털린 영혼과 빨랫감 가득한 여행가방만이 남겨진 것 같았지만, 그래도 여행은 그렇게 어딘가에 나의 웃음을 박제시켜 주기에 고생스러움은 모두 잊고 다시금 여행을 꿈꾸게 된다. 그 언젠가 내가 육아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날이 온다면 남편하고 사이좋게 둘이만 여행 가고 싶다.

(꼬마야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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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 주제는 '여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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