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한 달은 아이 학교 방학으로 사실상 내 개인 일정은 모두 셧다운 상태였다. 엄마가 되면 뭘 그렇게까지 아이 일에만 얽매여서 온통 난리일까 생각하던 시절도 있건만, 직접 해보니 그저 그것이 엄마의 삶이다. 괜한 엄살이 아니라 엄마는 그저 아이의 일정에 따라 온통 생활이 좌지우지되는 것이다.
아이가 마침 지난 금요일부터 개학을 해서, 마치 뭔가 아주 대단한 미션을 끝마친듯한 다소 홀가분한 기분으로 일요일에 홀로 뮤지컬 '웃는 남자'를 관람하고 왔다. 사실 어떤 작품이든 막이 올라가면 초반에 보러 가곤 했는데, 이번에는 시즌 막을 내리기 하루 전, 아마도 취소표가 나왔었나 싶은, 중간에 빈자리 하나를 냉큼 붙잡아 막차를 타게 되었다.
이 작품은 국내 뮤지컬 대형 기획사인 EMK에서 선보인 창작 뮤지컬 중에 하나이다. 상세한 배경 스토리까지는 알 길이 없으나 어쨌든 국내 창작 뮤지컬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현존하는 뮤지컬의 거장 '프랭크 와일드혼'의 손에서 작품이 탄생됐다. 일단 믿고 들을 수 있는 작곡가이니만큼 음악에 대한 의구심은 사실상 갖지 않았다. 더구나 원작은 빅토르 위고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됐는데, 간략히 스토리 라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7세기 영국에 아이들을 납치해 기형적인 괴물로 만들어 귀족들의 놀잇감으로 팔던 인신매매단 콤프라치코스에 의해 기이하게 찢긴 입을 갖게 된 아이, '그윈플렌'은 그들로부터 버림을 받게 된다. 추위 속에 헤매던 그윈플랜이 얼어 죽은 여자의 품에 안겨 있던 '데아'를 발견하고는 아기를 거두게 되는데, 그윈플렌과 데아는 우연히 우르수스라는 약장사를 만나 자신들의 스토리를 파는 유랑극단 광대로 성장하게 된다. 그윈플렌은 찢긴 입 덕분에 기이한 미소를 짓는 유명한 광대가 되고, 심지어 공작부인까지 그에게 매료되는 지경에 이른다. 그러던 중 그의 출생의 비밀이 밝혀져 그가 어린 시절 도둑맞은 귀족 집안의 자제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엄청난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거머쥐게 된 그윈플렌은 부자로서의 삶을 만끽하게 된다.
불우하고 가난한 삶 속에 성장하며 귀족들 앞에서 광대 노릇을 해야 했던 그윈플렌은, 누구보다도 하층민의 삶을 잘 이해하고 있다. 귀족 신분으로 참여한 의회에서 그 누구보다도 자신들의 이기심만을 내보이는 귀족들을 향해 서민들을 위한 정책을 주장하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건 야유와 무시뿐이었다. 하루아침에 귀족이 된 그윈플렌은 이러한 귀족들의 적나라한 이기심을 접하고는 이에 환멸을 느껴 결국 모든 것을 내던지고 다시금 유랑극단으로 돌아가고 만다.
돌아온 그가 맞이한 현실은 어릴 적부터 심장이 약했던 데아의 죽음 직전이었는데, 그윈플렌은 '넌 나의 전부'라는 넘버를 열창하고는 데아를 안고 바다로 향한다. 마지막 장면은 마치 죽음 이후에야 비로소 진정한 행복을 찾은 듯, 데아를 안은 그윈플렌이 와이어에 매달려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막을 내린다. 빅토르 위고라는 공통분모가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마지막 장면은 '노트르담 드 파리'에서 죽은 에스메랄다를 안고 애타게 절규하던 콰지모도가 연상되는 광경이었다.
부자들의 낙원은 가난한 자들의 지옥으로 세워진 것이다.
빅토르 위고가 자신의 작품 중 가장 걸작이라고 칭했던 소설이니만큼 이 작품을 통해 그가 담고 싶었던 인간사 메시지는 상당히 분명해 보인다. 부자들의 삶과 가난한 이들의 삶의 모습이란 그가 이 작품을 써냈던 19세기나 바로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내의 모습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 하루하루 먹고사는 것이 바쁜 이들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떤 게 자신들의 권리인지조차 제대로 알고 주장하기 어려운 경우가 허다하며, 그를 악용한 기득권들의 끝도 없는 이기심으로 세상은 늘 그들만의 리그로 점철되고 있지 않던가.
2018년 예술의 전당에서 초연하고 올해가 삼연째를 맞이한 이 작품은, 제작비 175억 원의 값어치는 톡톡히 했다고 본다. 찢긴 그윈플렌의 입 모양을 연상시키는 무대 세트가 상당히 볼만했다. 특히 이 반원 형태로 의회의 모습이 그려질 때는 그저 자기 몫을 챙기는데만 눈이 벌게진 귀족들이 다소 위태롭게 기울어진 형태로 있는 듯한 모습으로 보였다. 그것이 의도된 연출인지는 모르겠으나 기울어진 의자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테이블 위 조명(?)인듯한 물체를 붙들고 있는 모습이 어떻게든 자신의 부富를 지켜내기 위해 미련하게 매달린듯한 모습으로 연상되어 꽤 흥미롭게 보였다.
이미지 출처: 채널 예스
사실 스토리 자체에 상당히 무게가 느껴지는 대작이었으나, 어떤 부분에서는 다소 개연성이 떨어지지 않나 하는 아쉬운 부분도 보이긴 했다. 특히나 마지막 죽음을 택한 그윈플렌의 심경 변화를 이해 못 할 것은 아니나, 그가 모든 부와 명예를 내던지고 돌아오는 것부터 마지막 선택까지의 행보가 너무 급작스러웠다고나 할까. 그가 귀족의 자녀였음이 밝혀지기까지도 다소 억지스러움이 느껴진 건 내 기분 탓이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소 밋밋했다는 느낌이 드는 건 한정된 시간 내에 세밀한 극의 전환을 충분히 담아내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이날의 캐스팅 배우들 모두의 열연과 열창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마지막 무대를 앞두고 이미 그들의 합은 완벽 이상으로 잘 맞았기에 보는 관객들에게도 충분히 감동과 즐거움을 여유롭게 전달해줬다. 사실 조시아나 역의 김소향 배우님은 그야말로 무대를 찢어 놓는 가창력을 발휘해주셨는데, 이 역할 자체가 비중이 아주 크지는 않은 데다 언니 앤 여왕과의 갈등 구조가 그다지 드라마틱하지는 않다는 인상을 주었다.
무엇보다 독특하게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극 전체를 아울러 실제 바이올린 연주자가 무대에 등장하는데 그는 전체 극의 일부분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면서 실제 음악을 연주한다. 이 구슬프고 애절한 바이올린 사운드가 극 전체를 리드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초반 귀족들 등장 신에서 합시코드 사운드와 파이프 오르간 소리의 조합이 상당히 멋지다고 생각됐는데, 물론 이 모든 것은 실제 악기가 아닌 신시사이저의 공로이지만 악기 구성 조합만큼은 역시 프랭크 와일드혼답다는 생각에 엄지 척을 올린다.
실제 웃고 있지 않지만 늘 웃는 남자, 어찌 보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가면 속 얼굴을 대변하는 게 아니었을까.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며 우리는 가식의 미소를 마스크 속으로 감출 수 있었지만, 가려줬기 때문에 편안할 수 있었다면 가려졌기 때문에 엄청난 불편함을 호소하며 지내오지 않았던가. 그러한 인간의 양면성을 잘 담아 보여준 작품이 아니었다 싶다. 한 번쯤은 볼만하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탑 오브 탑 순위에는 올리지 못할 듯하다. 어쨌든 올해 시즌은 모두 막을 내렸으니 향후에 지속적으로 좋은 작품으로서 자리매김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