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마뮤 Feb 09. 2023

언제부터 핑크가 부끄러운 거지?

우리는 보통 출산을 앞둔 사람에게 뱃속의 아기가 딸이라 하면 핑크색 선물을 준비하고, 아들이라 하면 하늘색 선물을 준비한다. 그건 통상 오랜 세월 우리가 남과 여를 구분하며 세상적 기준으로 만들어낸 스테레오타입이라 생각되는데, 이게 정말 우리의 고정관념이기만 한 게 맞는 걸까?


실제 아이를 낳아 키워보니 아이에게 너는 여자니까 핑크색을 입어야 한다고 강요한 적이 한 번도 없건만, 아이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모든 것에서 핑크색을 선호했다. 핑크파가 아닌 내게는 진심으로 멀미 나는 일이었다. 세상천지 모든 게 핑크로 변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아이에게 굳이 콕 짚어 말로 해주지 않았음에도 핑크색을 선택하는 건, 그저 자연스럽게 타고나는 여성적 성향 때문인 걸까 아니면 여자 아이들 물건이 온통 핑크색으로 뒤덮여 판매되고 있기 때문인 걸까?


실제 오래전 회사 입사 초기에는 아동 브랜드 상품 기획팀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의류나 액세서리 수량 기획을 할 때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죄다 핑크색 아이템이었다. 담당자들도 핑크가 지겹단 소리가 나올 정도로 핑크색에 대한 수요는 정말 대단했다. 당시 미혼이던 나는 여자 아이들이 허다하게 널린 세련된 컬러들을 놔두고 왜 하필 꼭 (내 기준에서는 촌스러운) 핑크색에만 열광하는지 사실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내가 딸 키우는 엄마가 되고 보니 그저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아이가 학교에 다니게 된 이후로 등하굣길에 동행하다 보니, 고학년 아이들의 모습도 유심히 관찰하게 된다. 여자 아이들은 대부분 청바지나 시꺼먼 바지에 새까만 패딩 점퍼를 입고 다니는 모양새다. 한창 또래 집단의 영향력이 클 시기이다 보니, 서넛이 몰려다니는 그룹의 아이들을 보면 어쩜 하나같이 의논해서 입고 나왔나 싶게 차림새가 천편일률적이다. 모두 깜깜한 상하의로 뒤덮었다. 밤에 보면 그야말로 아무도 안보이겠구나 싶다. 보호색으로 중무장하고 중2병 게릴라전 준비하는 건가. 도대체 어린 시절 그 핑크 공주들은 죄다 어디로 간 거지?




아이들의 자아가 폭풍 성장하는 네 살 무렵부터는 슬슬 옷을 선택해 입는데도 자기주장이 상당히 강하게 들어간다. 물론 개인차가 있겠지만, 우리 딸은 저러니 내 딸이지 싶게 옷에 대한 열정이 일찍부터 대단했다. 나 스스로도 어린 시절부터 옷치례가 대단해 지금까지도 정말 의지를 다지고 또 다져 자제해야만 하는 사람인데, 저 아이가 커서 나처럼 옷장이 미어터지게 옷을 사댈 종자라 생각하니 갑자기 머리가 띵하다.

시선강탈!

아이의 성장하는 자아가 마음껏 의지를 펼칠 수 있게끔 최대한 간섭하지 말아야겠다 결심하고 내버려 뒀을 때 사진과 같은 결과가 나타났었다. 본인 생각엔 세상에서 가장 멋진 모습으로 단장한 것일 텐데, 진심으로 멀찍이 거리를 두고 걷고 싶었던 건 안 비밀이다. 온 동네방네 작정하고 시선강탈이었으니 부끄러움은 온전히 엄마몫일 수밖에.


이러던 아이가 이제 2학년에 올라간다.

이제 그 핑크 공주를 탈피하는 시기가 온 걸까. 얼마 전 아이에게 옷을 사줄 때가 됐다 싶어 어떤 색깔이 좋으냐고 쇼핑몰에서 골라보라 했다. 그랬더니 전에 없이 눈에 띄는 컬러는 죄다 싫단다. 그러더니 한단 소리가, 너무 밝은 색깔이나 무늬가 많은 건 사람들이 다 쳐다보는 거 같아서 싫다는 거다. 세상에.. 벌써 그런 걸 생각할 때가 됐다고?? 시선집중을 즐기던 너님은 어디 간 거니...


나도 자라는 내내 한참을 그렇게 남의 시선을 신경 썼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조금이라도 눈에 띄는 밝은 색도 기피했던 것 같고, 심지어 상의는 꼭 엉덩이까지 다 덮는 옷만 찾았던 기억도 난다. 나이 들어 이제 생각해 보니 생각보다 사람들은 남의 옷차림에 크게 오랫동안 신경을 쓰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런 반면, 요즘 세상에 옷이란 기본적으로 보호의 기능뿐만이 아니라 나를 표현하고 어떻게 보여줄 건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수단으로도 볼 수 있으니 어쨌든 선택의 기준이 나의 취향과 남의 시선에 있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을 듯하다.


아이가 자라는 것을 이렇게 다양한 것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제 머잖아 우리 딸도 깜깜한 옷만 찾는 날이 오겠구나 싶어 내심 섭섭해지려 한다. 그렇게 되면, 그땐 정말 총천연색 핑크 공주 시절이 아주 많이 그리워지겠지..

아기땐 마치 내 인형이라도 된 것처럼 이렇게 저렇게 참 예쁘게 옷을 입혔었는데, 이젠 정말 내 손을 떠나려고 시동을 거는가 보다. 아쉽지 않을 거라 장담했는데 솔직히는 아쉽다.

조금 천천히 가도 되는데...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방학이 싫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