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동안 쓰기를 멈췄었다. 자동차 속도를 늦추기 위해 과속 방지턱이 존재하듯 내 삶 속에도 가끔씩 너무 달렸나 싶을 때 한 번씩 글럼프가 찾아온다. 물론 과속 방지턱처럼 그저 조금 천천히 가라 워워~ 하는 정도여야 적당한 건데, 나는 멈춤 사인을 마주한 듯 완전히 서버리는 게 탈이다. 그러나 쉼이 있어야 재충전이 되고, 그래야 또 달려 나갈 힘이 생기는 법이니 이젠 이러한 멈춤 앞에서 당황하지 않기로 했다. 그 역시도 과정이기에...
주섬주섬 털고 일어나 이제 좀 가볼까 하는데 써보라는 주제가 '냉장고'이다. 냉장고를 두고도 수많은 인문학적 교훈과 철학을 꺼내놓는 게 가능하신 분들도 계시지만, 매일 부엌을 장악해야만 하는 나의 포지션에 있어선 그저 현실의 한 부분이다 보니, 지독히도 현실적인 생각만 떠오르는 게 사실이다.
올해 결혼 10주년을 맞이했으니 냉장고도 우리와 함께 10년을 살았다. 신혼살림을 마련하며 그다지 살림살이에 큰돈을 쓰지 않았기에 아마도 냉장고가 가장 고가품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떤 사이즈를 사야 하나 한참 고민에 빠져 주변인들에게 조언을 구했더니 대부분 냉장고는 무조건 커야 한다는 것이었다. 살림을 살다 보면 아무리 커도 부족해지는 게 냉장고라는 거다. 게다가 한번 사면 되도록 오래 써야 할 가전인데 나중에 곤란해하지 말고 애초에 큰 걸 장만하라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처음 신혼집은 정말 아담했는데, 그 얼마 되지도 않는 공간에 최대 용량의 4 도어 냉장고를 들여놓은걸 나중에 친정 오라비가 와서 보고는 이 작은 집에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며 어이없이 웃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봐도 다소 황당했지만, 그리 화려하게 펼쳐놓지 않았던 신혼집에 번쩍이고 커다란 냉장고가 얼마나 든든했는지 모른다.
조금은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냉장고 청소를 정말 안 한다. 냉장고를 위생적으로 관리해야 식재료 오염 문제도 방지하고 좋다지만, 눈앞에 보이는 공간을 청소하는 일도 죽지 못해 하는 편인데 다 끄집어내서 닦고 정리해야 하는 냉장고까지 돌보기에는 나의 살림 역량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렇게 관리를 잘 안 하다 보니 남은 음식 넣어두고 사놓은 식재료 쑤셔 넣고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제대로 뭘 넣을 공간도 안 보이기 일쑤다. 그렇게 되면 이제는 한 번쯤 뒤집어엎어야 할 시기가 왔다는 의미이다. 지난 금요일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아이를 등교시키고 오전 나절 정말 정말 크게 마음을 먹고 용감무쌍하게 냉장고 문을 열어젖혔다.(그렇다! 나는 냉장고 청소를 너무 하기 싫어서 진짜 크게 마음을 먹어야만 한다)
일단 하나씩 내용물들을 꺼내기 시작하니 아니나 다를까 각종 유물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나름의 고고학자가 되는 것이다. 여전히 부끄러운 얘기지만 날짜가 너무 많이 지나서 절대 입 근처에도 가면 안 될법한 음식들이 꽤 많이 등장했다.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손가락 끝으로 겨우 집어내 개수대에 내동댕이 친다. 음식물 쓰레기봉투는 가장 작은 1리터짜리만 사용하는데, 그 1리터 봉투가 N개 사용되었다고만 정리해 두겠다.(반성)
어느 의학 프로그램에서 봤는데, 아주 오래전엔 미국에 위암 사망자가 상당히 많았었는데 현재는 현저하게 감소했다고 한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를 살펴보니 바로 냉장고의 보급에 있다는 것이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엔 음식을 오래 저장하기 위해 염장을 하거나 훈제하는 등의 방법을 활용했는데, 그러한 음식들이 위장에는 그다지 좋은 음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냉장고가 보급되면서 신선한 식재료를 활용해 좀 더 음식을 건강하게 먹을 수 있게 되자 위암 발병률이 크게 줄었다는 이야기였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냉장고를 생산 판매하는 가전회사들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대한민국이 현재 위암 발병률 1위를 자랑(?)하고 있는 이유는 맵고 짠 우리의 식생활 때문이라니 참 아이러니하다.
전염병이 창궐했던 지난 몇 년 동안 대한민국 사람들이 무난하게 집콕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배달앱과 냉장고의 공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돌았었다. 냉동실을 열어보면 어느 집이나 열흘이상은 견딜법한 다양한 식재료들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까지 냉동실의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전염병의 위험을 불사하고 집 앞까지 배달을 해주시던 마트와 택배회사 배달원들 덕분이 아닐까. 그들이 진정한 워리어(warrior)였다고 단연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편리한 배달 시스템을 갖춘 나라가 또 어디 있을까 싶다. 예전 언젠가부터 대형마트에 가면 오늘만 살고 죽을 것처럼, 마치 전쟁이라도 대비하는 것처럼 카트가 미어터지도록 장을 보는 것이 생활화되었던 것 같다. 그건 전적으로 바쁜 현대인들의 생활 패턴 때문이었을게다. 내가 어린 시절 어머님들은 매일 장을 보러 가 그날그날의 식재료를 사다 음식을 해주셨었다. 그러나, 매일이 그저 바쁜 현대인들은 그렇게 자주 마트에 들러 여유롭게 뭘 먹을지 고민할 여유조차 주어지지 않는 것이 현실이니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잠들기 전 주문하면 새벽에 집 앞에 와있다. 물론 이런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편리함이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굳이 마트에 가서 미어터지도록 한꺼번에 장을 봐야 할 일이 사라졌다. 많이 사서 쟁여두고 그 존재를 잊어버려 본의 아니게 유물을 만들어버리는 일은 안 해도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유물을 양산하고 있는 나는 그저 반성!)
이번에 냉장고 유물들을 정리하며 그 생각에 이르러 다시금 정신을 차렸다. 마트에 가면 사실 그다지 필요하지 않던 것들도 갑자기 다 필요해지는 법이다. 눈에 보이면 그렇다. 그래서 사실 직접 마트에 가지 않고 온라인으로 장을 보는 편인데도 1+1이나 득템이라는 배너를 보는 순간 자제력을 잃기 마련이다. 그저 마케팅에 놀아나는 단순한 소비자임을 부인할 수 없다.
새삼스레 다짐해 본다. 필요한 만큼만 필요할 때 사자! 그래야 냉장고도 숨을 쉰다. 식도가 꽉 차도록 미어터지게 먹으면 소화가 안되듯, 냉장고가 꽉꽉 들어차면 전력을 더 잡아먹는다지 않는가. 먹지도 못할 것을 싸다고, 덤으로 더 준다고 집어 든 것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쓸데없는 물욕이 얼마나 미련한 냉장고를 만들고 얼마나 전력을 낭비하게 만들었던가. 슬기로운 냉장고 생활이 결과적으로 건강과 절약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점, 기억해야겠다.
글쓰기로 우주정복을 꿈꾸는 브런치 작가들이 모여 팀라이트가 되었습니다. 팀라이트 매거진에는 매월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하여 각양각색 이야기를 작가님들의 다른 시선과 색깔로 담아 갑니다. 이번 달 주제는 <냉장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