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이다음에 꼭 너의 일을 갖고 살아..
엄마는 그냥 집에서 살림만 하고 사는데, 이게 뭐니?
내가 자라는 동안 엄마는 내게 자주 이런 말씀을 하셨다. 그땐 사실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긴 어려웠다. 집에서 살림만 하는 게 왜 별로인 건지, 왜 사회에 나가 뭔가를 하고 사는 게 살림을 하는 것보다 더 낫다고 하는 것인지, 그 시절의 나는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집안 살림을 능숙하게 해내며 삶에 보람을 느끼시는 분들도 아주 많으시리라 생각되지만, 여하튼 우리 엄마에게 있어 전업주부의 삶이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마음속에 늘 뭔가를 하고 싶다는 욕구가 커서였을까, 내가 기억하는 우리 엄마는 언제나 무언가를 배우고, 만들고, 읽고 계셨다. 엄마가 자주 내게 이런 말씀을 하시다 보니, 내게는 성인이 된 후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 어떤 하나의 선택지가 아니라 너무도 당연한 일이 되어 버렸다. 그렇기에 그 어느 시점에서건 현모양처를 꿈꾸거나 가정을 잘 돌보는 전업주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마지막 출근 날 회사를 등지고 돌아 나오는 심정은 그야말로 착잡했다. 내가 회사에서 계속 승승장구할 정도로 일에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닌 듯하고, 그렇다고 특출 나게 조직에서 튀는 실력자도 아니었으며, 이도 저도 아니라면 약삭빠르게 사내정치를 잘하는 위인도 못되었다. 이런 삼요소에 속하지도 못한 주제에 어쨌든 나의 회사 생활은 그보다 길게 쭉 갈 거라고만 생각하며 살았던 내게 다소 예상치 못했던 마지막 날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꼭 사회생활을 이어가라고 습관처럼 당부하시던 엄마의 말씀이 대못이 되어 나의 뒤통수를 때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엄마와의 약속을 지켜내지 못한 듯한 패배감이 마음을 들쑤셨던 것이다.
패션 시장이 침체되고 회사 경영난이 닥쳐오며 점차적으로 조직을 털어내 규모를 축소해가는 모양새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뭐가 맞는지 알 수도 없는 '카더라' 통신은 매일 직원들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들쑤셔 놨고, 언제쯤 내 면전에 '정리'라는 통보가 날아와도 하나 어색할 게 없는 분위기로 매일매일이 침체되어 있었다. 그러던 중 새로 오신 담당 임원과 원활한(?) 관계 형성을 하지 못한 우리 팀은 그야말로 투명인간 집단이 되어 가고 있었고, 내일 당장 모두 책상을 빼라 해도 하나 이상할게 없어진 처지들에 마침내 그 순서가 닥쳐왔을 뿐이었다.
온전히 나만의 선택으로 박수 칠 때 떠나는 모양새였다면 아마도 나는 좀 더 당당하게 그럴싸한 이유를 장황하게 펼쳐놓으며 문을 박차고 나왔을 터이다. 그러나 그 마지막 선택이 회사의 '상황'과 나 개인의 '상황'이 뒤섞여 자의 반 타의 반의 선택이 되다 보니, 그렇게도 돌아 나오는 뒤끝이 개운치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후로도 상당기간 동안 마치 헤어진 연인을 쿨하게 털어내지 못하는 지질한 인간처럼 아주 오래도록 연연하며 지냈다.
최고의 인프라를 자랑하는 남편 회사 소속 어린이집 입소권을 손에 쥐게 되었을 때 그 어떤 것도 따져볼 이유가 없었다. 딸아이는 그렇게 무조건적으로 24개월을 찍음과 동시에 어린이집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아이는 세 살이 될 때까지 엄마가 곁에 있어야 한다는 나름의 당위성을 갖춘 것으로 포장된 주장들이 일찍 아이를 기관에 떼어놔야 하는 수많은 워킹맘들의 죄책감을 옥죄곤 하지만,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나온 시점에 오히려 더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는 모양새가 되었다. 일찍부터 사회(?) 생활을 한 아이들은 또 나름 그 안에서 배우는 게 많이 있기 때문에, 거기서 얻는 장점도 분명 많이 있다는 판단하에 망설임은 전혀 없었다. 혹자는 이제 회사도 안 나가는데 아이가 좋은 어린이집에까지 가게 됐으니 나보고 세상 팔자가 폈다며 부러워하기까지 했다. 속 모르는 소리...
당시엔 아이가 영아반에 있다 보니 어린이집에 머무는 시간은 짧았다. 게다가 동네에 어린이집이 있는 게 아닌지라, 남편 회사까지 아이를 데리러 매일 드나드는 거리가 상당했더랬다. 아직 꼬꼬마인데 차를 타고 40분~1시간 거리를 다니는 게 마냥 쉬운 일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좋은 기관의 훌륭한 환경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그 모든 불편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아침에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출근하면, 나는 서둘러 운동을 다녀와 정신없이 집안일을 마친 후에 아이를 데리러 뛰쳐나가야 하는 '애데렐라'의 삶이 시작되었다. 아무리 바빠도 내 삶의 균형을 지키기 위해 악착같이 운동하는 시간은 사수해냈다. 말하기 좋아하는 그 누군가들은 내가 회사도 안 나가는데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 있으면 그 시간엔 앉아서 우아하게 커피라도 마실 줄 알았던 건지 모르겠으나, 아이를 돌보며 집안일을 하는 전. 업. 주. 부. 의 삶은 그 누구보다 치열하고 정신없었다.
"그렇게 공부도 많이 하고, 그거 다 아까워서 어쩐다니..."
집에서 아이를 키운다고 하면 가장 먼저 튀어나오는 친지들의 안타까움 잔뜩 담긴 말이었다. 물론 진심으로 나를 생각해서 해주는 말인걸 잘 알면서도, 나 스스로도 편치 않은 마당에 대놓고 걱정들을 해주시니 그야말로 듣는 속이 쿡쿡 쑤시기 일쑤였다.
몸은 아이와 함께 있으면서 마음은 늘 어딘가에 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한 2년여간은 방황의 연속이었다. 끊임없이 궁리하고, 끊임없이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했다.
내가 전적으로 다른 곳에서 '회사'생활을 이어가려면, 나 대신 아이를 키워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 '대신' 해주실 분이 집안 어르신들일 수 없는 내 형편에, 입주 이모님을 들일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그저 타인에게 대가를 지불하며 내 아이의 양육을 '전적으로' 맡기는 건 내가 복직 후 겪었던 생활의 반복일 뿐일 터였다. 더구나 늦은 나이에 어렵게 얻은 귀한 아이를 그렇게 남의 손에 키우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그러기에 내게 적합한 일이란 건 회사가 아닌 다른 그 '무엇'이어야만 했다.
궁리하고, 시험해보고, 그렇게 새로운 경험치를 쌓아가며 다른 방향을 열심히 모색했다. 그러나 큰 조직에서 시스템화 된 업무 환경에 익숙했던 나는 다소 마구잡이 주먹구구식 세상 밖 일들을 처음 겪어가며 당황의 연속일 따름이었다. 아직 온전히 엄마에게 자유시간을 내주지 않는 어린 딸아이도 문제였지만, 생각 같지 않던 처음 마주한 세상으로 인해 점점 자신감은 사라져만 갔고, 결국 나는 다시금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역시 사람의 의식의 흐름은 대게 비슷하지 싶다. 내가 그 이후 찾아든 솔루션은 바로 '자격증'이었다.
국가 자격증 하나 따 보겠다고 어느 날 책을 사들고 학원을 등록했다. 매주 토요일 이른 아침부터 학원으로 쫓아 가 하루 종일 강의를 듣고 책에 머리를 박았다. 아이가 옆에 없는 시간을 최대 활용하기 위해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공부했다. 그도 부족하다 느낀 후로는 새벽 4시에 기상했다. 피곤한 하루하루였지만 그래도 뭔가에 매진하고 있는 내 모습이 만족스러웠다. 인간은 목표지점에 도달했을 때보다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과정에 도파민이 분비된다 하지 않던가. 나는 그 쾌감을 제대로 만끽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노력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줄 알았다. 이 나이가 되도록 노력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는 어느 축구 선수의 말을 신봉하고 있었던 겐가. 노력해도 배신당한다. 어쩌면 나이도 들고 공부 머리도 예전 같지 않아 뭔가 효율적인 학습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일 수도 있겠으나, 어쨌든 그렇게 치열하게 공부한다고 달려들었던 근 8개월의 시간을 '실패'로 마무리 지었다. 나는 번아웃 상태에 이르렀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모두 놓아버리고 매일매일 거실에 앉아 넷플릭스 세상을 항해하기 시작했다. 온갖 드라마를 정주행 하는 꿀재미를 알아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게 한 석 달 여 간을 빈둥거리며 드라마에 빠져 살았다. 솔직하게는 너무 좋았다. 그러나 인간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 그렇게 시간이 충분히 흐르니 이제는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막 시동을 다시 걸고 이제 좀 달려보자 마음을 먹으며 바지도 털고 발목도 풀어주며 출발선으로 걸어가는데, 세상이 달라지고 있었다. 바로 코로나가 시작된 것이다.
모두가 어려운 시절이 왔다. 아이를 돌보는 기관들도 모두 문을 닫아걸어야 했고, 그 때문에 아이를 맡기고 일터에 가야 하는 수많은 부모들에게 대혼란의 시대가 온 것이다. 아무리 조심한다 한들 그래도 여기저기 확진자가 속출했고, 그 바람에 남편 회사도 꽤나 오랜 기간을 재택근무에 돌입하기도 했다.
이 모든 소동을 거쳐오며 생각해보니, 그래도 내가 집에 있기에 아이를 어디에 맡기나 걱정하지 않아도 되어서 정말 다행이었지 싶다. 내가 옆에 있음으로써 아이한테 얼마나 더 정서적으로 큰 만족감을 더해줬는지 알 수는 없으나, 그래도 언제든 엄마로서 해줄 수 있는 모든 역할을 상시 수행해낼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감사할 일들 투성이다.
두 달여 전에는 친정아버지께서 다리를 다쳐 수술을 받으셨다. 연로해지신 터라 생각처럼 회복이 빨리 되지 않았고, 하루 걸러 병원 문턱을 넘어 다니시는데 내가 집에 있지 않았더라면 이 또한 너무도 큰 혼란을 야기할뻔한 일이었다. 아버지 모시고 다니는 일을 할 사람이 한국엔 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바삐 돌아가는 조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 새삼 또 감사해야 할 일이 되었다.
어디 인생사가 모두 생각 같기만 하던가. 왜 계획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흘러 왔을까 생각하며 나 스스로를 괴롭히기보다, 왜 이렇게 흘러와야 했는지를 돌이켜보면 그 모든 것이 어떠한 큰 그림 속에 있는 계획이었다는 생각에 이르러 오히려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나는 또 한줄기 긍정의 생각을 붙들며 관점을 달리 보는 깨달음을 얻어 간다.
언젠가 사춘기 아이들을 키우고 계신 어머님들과 대화 중, 나의 불안감과 고민을 털어놓은 일이 있다. 그때 그렇게들 말씀해 주셨다. 나는 좋은 콘텐츠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중에 아이가 더는 엄마 손이 필요하지 않을 때가 오면, 그때 새로운 일을 저질러도 절대 늦지 않는다는 용기를 주신 것이다. 아이에게 엄마가 필요한 시간은 정말 한정적이기 때문에, 어차피 지금의 선택이 육아맘이라면 최선을 다해 그 시간에 충실하라는 것이었다. 사실 그 말씀에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빨리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영영 아무것도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스스로를 옥죄고 있던 나에게 마치 가뭄에 단비처럼 속 시원한 위로와 해결의 말씀이 되었더랬다.
지금의 나는 그저 현재를 감사하며 하루하루에 최선을 다한다. 나는 아직도 갈 길을 찾는 중이고, 그 안에는 이렇게 글 쓰는 삶도 담겨 있다. 급하게 달려갈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차근히 하나하나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나가며 그저 준비할 따름이다. 두드려보고 생각하고 경험해가며, 주변도 살피고 배우면서 앞으로 찬찬히 나아갈 뿐이다. 내가 지금 멈춰있다고 생각할게 아니라, 그 어떤 것보다도 귀한 '엄마'라는 경력을 차곡차곡 쌓아 나가며 내 발길 닿는 곳이 어디일지 조심히 걸어가 볼 것이다.
그렇게 공부했어도 전업주부 될 수 있다. 우리 엄마는 내게 다른 삶을 살라고 늘 말씀하셨지만, 100세 시대에 아직 반절도 못 미쳤는데 앞으로 내가 어디로 뻗어나갈 줄 알고, 멈췄다고 생각하기엔 너무 섣부르다.
늘 엄마에게 죄송한 마음이 너무 컸었는데, 그저 묵묵히 내 길을 걷다 보면 그렇게 또 다른 기회를 만나게 될 것이라 믿어볼 밖에.. 그렇게도 딸을 응원하고 밀어주시던 우리 엄마도 하늘에서 지켜보시며 내 가는 길에 방향 지시등을 깜빡깜빡 켜주시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