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앞에서의 상념(想念)

[글모사 9기] - 시작

by 마마뮤

대체적으로 우리는 '시작'이라 하면 뭔가 새롭고 설레는 감정을 떠올리게 되곤 한다.

시작은 곧 그 어떤 것에서든 새로운 것과의 만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시작이라는 지점에서는 예측할 수 없는, 그 어떤 다음 단계로 가기 전의 상태에서 맞이하게 되는 온갖 감정들이 담겨있다. 단순히 시작이기 때문에 그 감정이 설렌다고만 단정 짓기엔 사실 너무도 다양한 시작이 있지 않던가. 어떤 시작은 벅차기도 하고, 또 어떤 시작은 두렵기도 하다.



호주로 떠나던 아주 오래전 그날은 온통 설렘이 가득이었다. 가족들과 함께 떠났기에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은 전혀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었고, 그곳은 내게 오로지 자유만을 줄 것 같은, 나만의 착각으로 잘 포장된 넘치는 기쁨과 설렘이 그 시작에 가득 차 있었다. 어떠한 시작에 있어 조건과 만약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었던 철 모르는 시절이었다.


처음 오페라 코치라는 관문 앞에 섰을 때 그 시작의 감정은 약간의 당황스러움과 어리둥절이었던 것 같다. 피아노 전공학도였던 나는 그저 끝을 모르고 막연하게 석사과정을 이어가려던 계획이었는데, 예상치 못했던 낙방으로 인해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 상황이었다.

오페라 코치라니? 그게 뭐냐며 시작했던 공부가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다.

예상치 못했던 실패가 가져다준 당황스러운 기회는 내게 '전화위복'이었다는 깨달음을 얻게 해 주었다.

그렇게 찾아왔던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는 그저 어리둥절한 시작이었다.


미국으로의 유학, 그 도전의 시작은 온통 비장함과 절박함, 그리고 걱정의 감정뿐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세계에 무모하게 도전장을 던져 버렸고, 이미 저지른 일을 반드시 성공적으로 수습해야만 했다. 게다가 투병 중이시던 엄마의 마지막 날들이 다가오던 시점에 어렵게 어렵게 마음을 정하고 천근만근 바위 같은 발길을 겨우 떼내어 올라탔던 비행기였다.

도착했던 첫날, 그곳 하늘의 화창하던 오후 햇살이 그렇게도 슬펐던 기억이 난다. 걱정의 눈물로 시작한 첫걸음을 힘겹게 마무리 짓던 마지막 순간에도, 결국엔 해냈다는 감격으로 북받쳐 온통 눈물로 장식했었다. 그 시작부터 끝까지 나를 짓눌렀던 감정은 막막한 현실과 엄마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처음 직장인으로 맞이한 회사에서의 새로운 시작, 그 시작은 뿌듯함이었다.

해냈다는 자랑스러움과 자신감으로 가득 찼던 나는 대한민국의 직장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그저 벅차고 기뻤다. 물론 그 설렘도 곧 현실을 마주하며 점차 퇴색되어 갔지만, 시작은 그렇게 '맑음'이었더랬다.


남들보다 쓸데없이 도전을 좀 많이 하다 보니 시작이 늦은 것들이 꽤나 많다.

이제는 평생 혼자 살아야 하려나보다 포기할 때 찾아온 새로운 만남. 그 시작은 온통 핑크빛이었다.

늦바람이 무섭다고 소위 다 늦은 나이에 사랑의 감정을 품는 것은 왠지 모를 쑥스러움과 동시에 그저 행복함이었다.


내가 엄마가 되던 날은, 그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길이 없는 감정이 함께 했던 시작이었다.

결코 준비란 건 있을 수 없었던 그 시작은 그저 실전에서 구르며 정신없이 배우는 당황의 연속일 뿐.. 시작은 있었으나 끝은 안 보이는 것 같았던 육아 전쟁, 그 전쟁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지만 부쩍 많이 자란 아이를 보면, 표현할 길 없었던 그 육아 전쟁의 시작도 이제는 소중하고 값진 보석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준비 없이 엄마로서 거듭남은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최고의 시작이었다. 내 인생에 가장 소중한 보물을 얻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현재에 가장 감사하는 또 다른 시작은 바로 글쓰기이다. 글쓰기는 나에게 치유와 만족이다. 끝도 없이 방황하는 내 마음을 붙잡아 준 것은 바로 글쓰기였다. 거기엔 감사함과 설렘이 공존한다. 어디를 향해 가는지 생각할 필요도 없고, 온전히 글로 나를 내어 놓으며 내면의 나를 만난다. 내면의 나를 내어 놓음으로써 그렇게 또 세상과 연결된다.

이 시작이 없었더라면 나는 오늘도 그저 방황 속에 있었을 것이기에, 이 소중한 순간들을 오래오래 이어가고 싶을 뿐이다.



수많은 시작 속에는 이렇듯 다양한 상황과 감정이 존재했다. 중년의 진중함에 파묻히다 보니, 사실 이제는 쉽사리 그 어떤 것에서도 '시작' 버튼을 누르기가 참 맘 같지 않다. 그저 어린 시절 단순히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었던 시작들보다, 이제는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는 큰 용기가 필요하고, 또 그것을 밀고 나갈 끈기와 노력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걸 너무 알아버린 탓이 아니겠나.


그러나 그렇게도 수많은 복잡다단한 감정들이 뒤섞인다 해도, '시작'은 분명 떨림이 있다.

한 해가 시작되는가 싶더니 벌써 상반기가 접히고 하반기가 열리는 7월이 되었다.

이 시작에 또다시 소박한 기대감을 가져보게 된다.

우리는 언제나 전보다 더 나아지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게다.

시간이 흘러 나중에 이 잔잔한 시작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또 어떠한 감정으로 정의를 내리게 될진 모르겠다. 분명한 건 이 시작은 뭔가 다시금 리셋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는 것 같아 안도감을 주는 듯하다. 다시금 마음을 잡고 다가올 날들을 착실하게 채워보겠노라 다짐하며 지금의 시작을 꾸욱 눌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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