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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마뮤 Jul 13. 2021

우연을 가장한 필연

[글모사9기]- 우연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이 뜻하지 않게 일어난 일


'우연'의 사전적 의미이다.  

생각해보니 요즘 같은 세상엔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바깥 활동이 많았던 예전에는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사람도 심심찮게 많았고, 우연히 길을 걷다 발견하는 맛집이나 카페도 있었고, 우연히 얻어걸린 특가 제품에, 우연히 떠나게 된 여행으로, 그렇게 우연히 일어나는 일련의 일들로 인해 다소 반복적이고 따분할 수 있는 일상에 신선한 양념이 되어주곤 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내 의지와 상관없이 집에 머물러야 안전한 세상을 마주하고 보니, 그렇게 오며 가며 우연히 일어나던 일들은 사라진 지 오래다. 기껏해야 내 집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 그렇게 '우연히' 일어날 일이 도대체 뭐가 그리 많이 있겠는가. 요즘 같아선 잔여백신 맞을 기회를 우연히 얻게 된다면 그게 바로 나름의 횡재라고나 할 수 있지 않겠나 싶다.




어릴 적 뭔가 엄마에게 혼날일을 했을 때나, 또는 어떠한 곤란한 상황에 놓였을 때, 우리가 얼마나 일반적으로 '우연'이란 말을 남발하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먹지 말라는 불량식품을 엄마에게 들켰을 때, 그건 분명 우연히 마주친 친구가 준 것이 되었을 테고, 지켜야 할 약속 시간에 늦었을 땐 분명 일찍 집을 나섰지만 우연히 타고 오던 지하철에 문제가 생겼을 테고, 몰래 사서 숨겨놓았던 물건을 남편에게 들켰을 땐, 우연히 지나다 반값에 파는 걸 발견했다고 말을 했을게다. 이렇듯, 나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야말로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이 뜻하지 않았는데 그러한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우연'이라는 단어가 거짓말에 얼마나 유용하게 쓰이는지가 새삼스럽기까지 하다.


그래서일까. 누군가 '우연히' 일어난 일을 장황하게 설명하면 눈을 게슴츠레 뜨게 되는 건, 그만큼 이 말을 적극 활용한 거짓말을 많이 해봐 찔리는 탓일 게다. 그러나 정말 거짓말이 아닌 우연이었음에도 지금껏 속 보이는 거짓말이라며 우리 남편이 절대 인정해주지 않는 스토리가 있으니, 바로 남편과 나의 만남에 얽힌 사연이다.


상당히 늦은 나이에 소개를 통해 만나게 된 남편은 서글서글한 인상에 첫 만남부터 '말이 좀 통하는' 그야말로 이런 희귀남이 "아직도"남아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사실 마음에 들었던 '첫' 남자였다. 이미 나이도 들만큼 들었겠다, 어디 남자분이 선택해주실 날만 기다리고 있을 때이던가. 맘에 들면 전진! 시대가 바뀌었으니 기다릴 필요 없었다. 사실 정말 될 '인연'이었기에 하늘이 도와 그런 '우연'들이 생기지 않았겠냐 하는데, 나는 그 우연의 기회들을 절대 흘려보내지 않고 덥석 잡았을 뿐이다.


남편과 소개를 받고 한두 주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다. 회사에서 디지털 마케팅을 담당하고 있던 나는 정말 하루가 멀다 하고 매일 새로운 것들이 등장하는 업계 동향을 쫓아가기 위해 수도 없이 열리는 관련 콘퍼런스에 족족이 참석을 해오고 있었다. 2주간 두 개의 콘퍼런스에 연달아 참석을 하게 되었는데, 그거참 공교롭게도 두 개 다 장소가 남편의 사무실 근처였던 것이다. 심지어 한 군데는 길만 건너면 마주 보고 있는 건물이었다.

마침 퇴근시간 언저리에 콘퍼런스도 종료가 될 상황이기에 나는 아주 용. 감. 하. 게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마침 제가 콘퍼런스 참석차 근처에 있으니 퇴근 후 시간이 되시면 잠시 볼까요?'


업무가 바빠 아마도 야근이 예정되어 있었던 모양인데, 그는 흔쾌히 그러겠노라며 잠시 내려왔다. 나는 콘퍼런스에서 받은 '비타 500'을 어쩌다 보니 안 마셔서 가방에 챙겨가 그에게 내밀었다. 그 순간 남편은 그렇게 생각했단다.


'아니 뭐 이런 걸 다.. 이 여자 센스 봐라...'


나는 어차피 안 마셔서 들고 가 내밀었던 비타 500이, 마치 피곤한 그를 생각해 일부러 편의점에 들러 하나 사 온 것과 같은 센스 넘치는 여인내가 되고 말았다. 이런 '우연한' 만남에 이런 '우연한' 센스라니...


두 번째 콘퍼런스는 그의 사무실에서 200미터쯤 걸어가면 위치한 호텔에서 열렸다. 역시나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만남을 청했다. 그의 건물 앞으로 갔더니 누런 종이봉투를 조용히 내민다. 지난번 비타 500에 대한 화답(?)으로 회사 식당에서 받아두었다며 각종 과일이 담긴 봉투를 내게 주는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아니 뭐 이런 걸 다... 이 남자 소년 같은 갬성 좀 봐라....'


아마도 점심으로 먹다가 남은 과일이었을 테지만, 뭐 아무려면 어떠한가. 또 다른 '우연한' 만남에 전해줄 수 있는 '우연히' 남은 과일이 있었으니 말이다.




정말로 그 두 번은 우연이었다. 내가 새삼스레 콘퍼런스를 신청한 것도 아니었고, 어차피 가기로 예정되어 있던 행사들인데, 때마침 그의 사무실 근처였기에 연이어 우리가 만나는 '우연'이 발생했던 것이다.

남편은 지금까지도 강력히 주장한다. 자기가 그렇게도 좋았냐며.. 안 와도 되는걸 굳이 신청해 참석할 만큼 근처에 그렇게도 오고 싶었냐며... 가끔씩 이거로 아니네 맞네 해가며 실랑이를 벌이지만, 어차피 승자는 없다.

이제는 가끔 주먹을 불끈 쥐게 될 때도 있지만, 그렇게 착각해서 당신이 행복하다면 내가 그냥 우연을 가장한 필연을 만들어낸 거짓말의 주인공이 되겠소이다 할 따름, 그것의 진실을 부득부득 밝혀내 이겨봐야 이미 같이 살고 있는 이상 달라질게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열심히 콘퍼런스를 쫓아다녀 얼마나 회사 업무에 엄청난 기여를 했는지는 지금 현재에서 밝혀낼 길은 없지만, 그렇게 꼬박꼬박 교육비 다 대주며 시간 빼주고 배워오라고 지원해주신 회사에 이제야 새삼 감사의 말씀을 전해 본다. (그래 봐야 못 보겠지만..)

덕분에 인생의 배필을 만났습니다.. 땡큐!






*이미지 출처 - 나무위 '테헤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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