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마뮤 Jul 12. 2021

그랜드 캐년, 너 거기 있니?

[ 글모사 9기] - 추억

누구나 살면서 가끔씩 무용담처럼 끄집어내는 추억 얘기가 있을진대, 막상 무엇이 있던가 꼽아 보니 쉽사리 떠오르지가 않는 것 같다. 사실 이만큼 살아오고 나니 그만큼 쌓인 스토리가 많기 때문이리라.

가만히 앉아 머릿속 추억앨범을 스캔해보다 불현듯 그때가 떠올랐다.




때는 1993년 1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반구인 호주는 그때가 한창 가장 더운 여름이다 보니 오빠와 나는 한 학년을 마무리하고 여름 방학을 맞이한 참이었다. 부모님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별 기대도 안 하고 있던 오빠와 나를 그 해 여름 방학 미국에 있는 외갓집에 보내주셨다.


시드니부터 LA 공항까지 날아가는 여정은 정말 멀고도 멀었다. 직항을 이용했는데 비행시간만 거의 13시간 반 정도가 걸렸던 것으로 기억한다.(LA에서 시드니로 내려가는 비행은 무려 15시간으로 한 시간 반이 늘어난다)  

갑갑한 비행기 안에서는 단 30분 차이도 마치 3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비행기 안에서 지겨움으로 몸부림치던 것만큼은 아직도 생생하다.


외가 식구들은 내가 아주 어릴 적 모두 미국에 정착하셔서 사실 형제들 중 한국에 살고 있는 사람은 우리 엄마 한 사람뿐이었다. 내가 자라는 내내 미국에서 이모, 삼촌들, 할머니께서 가끔씩 오가시며 소위 '미제(美製)' 장난감들을 사다 주시니 나름 그게 동네 친구들에게 그렇게도 자랑 꺼리였더랬다. 그렇게 가끔씩 얼굴을 보며 지내오다가 우리가 미국 외가에 방문을 하는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우리 가족이 호주에 정착하고 2년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으니, 나름 그동안 '외국물' 좀 먹은 상태였건만, 미국은 호주와는 또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차를 타고 가는 길에 도로에 뭔가 공사를 하고 있나 싶은 광경을 발견했는데 삼촌께서 말씀해주시길 석유를 시추하고 있는 모습이라는 거다. 세상에 그야말로 아무 데나 땅을 파면 석유가 나오는 그런 나라였다. 동네길 도로 한복판에서 석유라니.. 남반구 촌놈이 다된 나는 천조국이란 이런 거구나 그저 혀를 내둘렀던 기억이 난다.




정말 그야말로 미국에 처음 방문한 조카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해 주신다며, 생업으로 바쁘신 삼촌께서 직접 데리고 가지 못하니 오빠와 둘이서 다녀오라며 그랜드 캐년 단체 투어에 신청을 해주셨다. 단체 여행이라는 걸 가보는 것도 처음이었던지라 처음 보는 사람들과 함께 버스에 올라타고 여행을 떠난다는 사실이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한인타운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타러 가니, 사실상 한국에서 여행 오신 분들이 전부였다. 장성한 딸과 함께 오신 부모님 팀, 친구분들과 함께 오신 어머님 아버님 등등 사실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이 대다수인 가운데 막 군대를 제대하고 여행을 떠나왔다는 너무도 웃긴 젊은 오빠와 또 다른 젊은 오빠, 그리고 우리 남매가 뭉쳐 소위 '젊은애들' 팀이 결성되어 가는 내내 버스에서 너무도 즐거운 시간을 가졌더랬다.


장장 10시간을 버스로 이동해야 됐는데, 이른 아침에 출발하여 중간중간 휴게소를 들르긴 했으나 그야말로 하루 종일을 버스 안에서 지내야 했다. 휴게소에서 정말 주먹 두 개만큼이나 큰 오리지널 '캘리포니아 오렌지'를 간식으로 줬었는데, 역시 맛있는 건 현지에서 다 소비를 하는 게 분명하다. 내가 태어나서 먹어본 오렌지 중 가장 맛있는 오렌지로 손꼽히고 있는데, 지금까지도 그 기록을 깨는 오렌지를 발견하지 못했다.(물론 여행에 취한 기분 탓이었을 수도 있겠다)

잠시 옆길로 새자면, 예전에 부산 자갈치 시장에 갔을 때, 여기저기 널려 있는 정말 커다랗고 싱싱한 물고기들을 보며, 이런 거 서울에선 구경해본 적도 없는데 크고 좋은 건 부산 사람들이 다 먹나 보다 했던 기억이 있어,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크고 맛있는 오렌지도 모두 캘리포니아 거주자들 입으로만 들어갔나 싶다.


하루를 꼬박 달려간 우리는 그랜드 캐년 근처 트레블 로지(Travelodge)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이른 새벽 그랜드 캐년을 향해 출발하는 일정이었다. 저녁 식사 후 가이드 님의 친절한 안내 말씀이 있었다.

"내일 새벽 일찍 출발할 테니 빨리들 주무시고요, 근데 새벽에 눈이 내린다는 예보가 있어서 어떨라는지 모르겠어요.. 예보가 안 맞길 바래야죠 뭐~? 하하~"

그때는 그게 무슨 뜻인지 전혀 몰랐다. 아마도 눈 내리는 그랜드 캐년은 아주 운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그냥 봐도 멋지다는 걸 그렇게 예쁘게 볼 수 있는 나는 웬 행운이냐며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을 뿐...

(이런 나의 초긍정이 싫을 때가 있다)




그 새벽에 애리조나엔 왜 그렇게도 눈이 내렸던가..


그것도 함박눈이 펑펑!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라는 이승환의 명곡은 이럴 때 항상 떠오른다)

기억에서 삭제됐지만 아마도 버스는 엉금엉금 산길 비슷한 데를 기어갔을게다. 가이드 님이 아주 정말 조금 살짝 운이 없다면 안 보이는 수도 있다는 엄포를 놓았다. 설마 그럴 리가.. 강한 현실 부정과 초조한 마음으로 숨죽이며 밖을 지켜봤다. 나는 무려 남반구 저 밑에 있는 동네부터 비행기를 14시간 가까이 타고 와서 또 그 전날 하루 종일 버스를 타고 여기까지 왔는데, 설마 그럴 리가.. 안 보인다는 게 도대체 뭐야... (상상불가)


버스가 '전망대'라고 추정되는(?) 어떤 곳 앞에 멈춰 섰다. 그러니까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불과 한 5m쯤 앞에 난간이 있었는데, 그러니까 그 난간이 전망대라는 거다. 그런데 내 눈에 보이는 광경은 그 난간 밖으로 무려 새하얀 백 도화지 같은 눈밖에 보이는 게 없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한 치 앞도 안 보이게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맘 아프게 다시 풀어서 말하자면, 그러니까 거기에 그랜드 캐년이 있다고 그랬다.


"응?" "네?" "저기 있다고요???"


하루 동안 함께 동고동락해온 재밌는 젊은 오빠의 가슴을 후벼 파는 멘트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와나... 내 팔자에 무슨 그랜드 캐년인가 했어... 완전 도봉산이잖아!"


지금은 그때의 사진들을 어디에 넣어놨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 하지만, 그때 '그랜드 캐년'이라 추정되는 장소 앞에서 찍어온 나의 기념사진엔 그저 해맑게(영혼 빼고) 웃고 있는 내가 서 있다. 누가 봐도 도봉산인 배경에서.. (그때 맺힌 게 있어 그러는지 몰라도 난 여태 도봉산을 안 가봤다. 그리고 안 갈 거다. 도봉산 미안!)


그냥 돌아서면 너무 섭섭(?)하니까, 그곳에서 상영해주는 '그랜드 캐년'을 무려 '아이맥스'로 봤다. 당시 63 빌딩(現 한화 빌딩) 아이맥스 영화관에 가면 볼 수 있는 바로 그 필름이었다.

와~ 어찌나 화면이 크고 생생하던지 요즘 디지털 상영관 3D 화면 기술보다 훨~~ 씬 멋진 그 엄청 큰 화면의 영상을 마치 내가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눈 튀어나올 정도로 빠져들어서 봤는데 그게 63 빌딩에서 보는 것보다 그랜드 캐년에 가서 그 바로 앞에서 보니까 진짜 너무 말도 안 나오게 멋진 거다. (쉼표 없음 주의! 내가 정말 이렇게 신나 했을 거라고 생각하신다면 경기도 오산)

나! 그랜드 캐년 필름 그거 그랜드 캐년 가서 본 여자야 왜 이래...




지금도 가끔씩 친정오빠와 이야기 나누다 그때 그랜드 캐년 이야기를 하면 허탈해하며 웃는다. 돌아오며 내 생애 다시 이곳을 밟을 기회가 생길까 했었는데, 아직까지는 그 기회를 만들지 못했다. 이렇게 코로나 시국까지 맞이하니 도대체 우리가 자유롭게 해외여행을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나 할까 싶은 마음에, 바로 코앞에서 못 보고 발을 돌렸을지언정 그때 그 여행이 참 그리워진다.


우리보다 앞서 미국에 다녀오셨던 엄마는 그랜드 캐년 여행 후 그때의 느낌을 이렇게 표현하셨었다. 전망대 앞에 서니 마치 그 밑으로 후~욱 빨려 들어갈 것 같은 표현하기 힘든 웅장함에 다리가 떨리더라고...


눈앞에 펼쳐진 백 도화지 뒤에 그런 다리 떨리는 웅장함이.... 아마도 있었겠지요...

그랜드 캐년, 너 정말 거기 있었니?

꼭 다시 만나자..









매거진의 이전글 글 쓰는 날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