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생활을 통과하며

몸이 항상 무겁고 피곤하신가요?

by 지각쟁이

산다는 게 점점 좋아진다. 일기를 쓰고부터였다. 평면적이던 일상을 일으켜 세우는 일이랄까. 삶을 깊이 느낄수록 아껴주고 싶은 것들이 늘어갔다. 그러자 후회할 일보다 기대할 일이 더 많아졌다. 채마 밭에 뿌린 씨앗이 흙을 뚫고 올라오길 기다리는 마음처럼. 조금 늦은 나이지만 꿈도 하나 생겼다. 50살 안에 할머니 여행 작가가 되는 일이다. 나는 역마살이 껴서 방방곡곡을 쑤시고 다녀야 사는 사람이다. 중년여성에게 허기증이 찾아올 즈음 자식이나 돈에 매달리지 않고 좋아하는 일을 쫓으며 살고 싶다. 코로나가 떠나면 가장먼저 여행을 가고 싶다. 안동의 구불한 물길이 머릿속에서 너울너울 다시 오라 손짓을 한다.


여행이 그리워질 때면 안동 고택에서 묵었던 하룻밤을 떠올리곤 한다. 고택에는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커다란 나무대문이 있었다. 오래도록 햇볕을 견뎌서일까 목재가 까맣게 그을렸다. 체중을 실어 대문을 열면 금세 또 다른 문으로 이어지던 커다란 가옥이었다. 그 당시 집주인의 세력이 대단했으리라 생각되었다. 우리는 사랑채 중에 한 곳을 빌려 묵기로 했다. 그 당시 우리는 부부의 연을 맺기 전이었다.


우리는 뱀이 앞으로 나아가듯 구부러진 강가를 끼고 하회마을을 거닐었다. 흙으로 낮게 지어진 담 사이로 그를 힐끔 바라보는데 불어오는 미풍에 머리칼이 흔들리자 나는 좀 어지러웠다. 우리는 초가집에서 기념품으로 산 부내탈을 놓고 서로 하회탈이라며 우겨댔다. 나는 그런 싸움조차 좋아 자주 하회탈 얼굴을 하곤 했다. 마을 어귀에는 삼신당이 있었다. 그곳에는 600년 풍산 류씨의 역사를 함께해온 거대한 느티나무가 있었다. 자손의 탄생과 건강을 지켜주는 나무였다. 우리는 한지 위에 소원을 적어 새끼줄에 끼워 넣었다. 그때 그는 무엇을 빌었을까. ‘돌덩이처럼 가만히 그이 옆에 놓아 주세요’라고 적었다.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냅킨 위에 올려놓은 작은 조약돌처럼 말이다. 그가 적은 소원을 몰래 훔쳐보려다가 괜히 애꿎은 종이만 구겨서 주머니로 넣었다. 그때 나는 좀 자신이 없었다.


우리는 무작정 발길이 닿는 대로 거닐었다. 하늘을 반쯤 가린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싼 적벽서원을 만났다. 절벽 아래 흐르는 거대한 물줄기에 앉아 물수제비를 뜨며 이대로 시간이 멈추어 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강가에 웃자란 무명의 풀들이 흔들리자 우리는 따라 춤을 추기 시작했지. 붉은 고추를 고명으로 올린 찜닭에 마신 안동소주가 효력을 발휘했나보다. 어깨를 짓누르던 짐을 잠시 내려놓은 우리의 모습이 편안해졌다. 그 시절 그가 홀로 짊어진 삶의 무게를 나눠들고 싶었지만 해줄 수 있는 거라곤 고작 함께해주는 것 뿐이었다. 그를 잠시 쉬고 웃게 하는 것. 풀밭위에서 자유롭게 흔들리는 그를 보며 너덜웃음을 지었다.


물결처럼 돌아다니다 해질녘이 되어 고택에 들어갔다. 기와집 위로 붉은 석양이 혜성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뜨끈한 구들방 바닥에 앉아 여행사진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문득 앞에 놓인 작은 툇마루가 떠올랐다. 우리는 늘 바람과 함께하는 걸 좋아했다. 큰 창문이나 테라스가 있는 식당을 부러 찾아다녔다. 팍 트인 툇마루에 앉아 우리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더 이상 피할 수가 없었다. 길어진 연애시절 끝에난 지방 발령으로 이별을 앞두고 있었다.


‘우리 이대로 이별할 것인가, 결혼할 것인가...’


누구 하나 먼저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 툇마루에 그저 멍하니 앉아있었다. 하늘 위로 안동 월령교의 달빵처럼 희고 둥그런 달이 떠올랐다. ‘기집애처럼 희고 가는 손으로 그가 한 조각 떼어 내 입으로 밀어주던 달빵은 참 시원하고 달달했는데...어느새 벌써 이별의 밤이라니.’ 밤바람이 쌀쌀해 니트를 여미는데 어디선가 ‘투둑~’하는 소리가 들렸다. 까만 밤하늘을 한참 노려보고 나서야 툇마루 앞마당에 커다란 감나무가 서있는 걸 발견했다. 감나무 하나에 쌀알처럼 많은 감이 달리는지 처음 알아서 놀랬다. 자세히 보니 시커먼 밤하늘은 주황빛 복주머니들이 탐스럽게 빛났었다. 우린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지는 감을 바라보며 자주 할 말을 잊곤 했다. 서로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는데 감이 ‘툭~’하고 낙하했다. 마른 낙엽이 깔린 땅위 어디선가 바스락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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