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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각쟁이 Jul 19. 2022

올여름 파충류로  살고 싶어...

뜨거우면서도 시원한 여름의 맛

   

나에게는 아주 분명한 주관들이 몇 가지 있다. 그중 하나는 내가 여름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긴긴 여름, 후끈한 열기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건 어쩔 도리가 없기 때문에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다.


올해는 오래도록 냉감이 유지되는 쿨스카프와 목에 거는 휴대용 선풍기를 장만했다. 모기를 막아주는 팔찌가 담긴 택배 상자를 뜯던 순간 숨겨둔 괴력이 솟아났다. 상자에서 나온 작고 귀여운 캐릭터 해충 팔찌를 팔에 차고 소녀처럼 웃었다. 준비물을 빠뜨린 채 학교로 걸어가던 소녀처럼 순수한 미소를 지었다.  

   

한 여름날의 해넘이가 시작되었다. 창밖은 빨갛게 불타고 있었다. 파란 불기둥이 이글거리는 가스레인지 앞에 서서 요리를 시작했다. 삼구 레인지 한쪽에는 참기름에 황태를 달달 볶은 뭇국이 끓여지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선 조기들이 머리를 나란히 모으고 노릇한 갈색으로 튀겨지고 있었으며, 나머지 한쪽은 하지감자가 자박자박 간장 옷을 입고 있었다. 뒤집개와 국자로 묵직한 유리뚜껑들을 여닫으며 뒤적거릴 때마다 속옷 아래로 비가 내렸다. 유리알 같은 땀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상고온으로 연신 최고 기록을 갈아치우던 올여름에 가장 필요한 준비물은 인덕션이었던 것이다. 냄새를 빼려고 열어둔 창문으로 습한 바람이 넘어오고 가열된 냄비는 열기는 내뿜었다. 아무도 나를 건드린 지 않았는데 속에선 자꾸 화가 치밀었다.

       


열린 땀샘에서 땀이 줄줄 흘렀다. 한 마리의 개구리가 된 듯 촉촉하다 못해 끈적거리기 시작했다. 꿉꿉함을 씻어내려고 자주 샤워를 하다 보니 피부가 건조해졌지만 이것만큼 효과적인 방법이 없었다. 인중과 겨드랑이 , 등과 가슴에서 땀을 줄줄 흘리다 보니 변온 동물인 파충류가 떠올랐다. ‘무더위 속에서도 보송한 한 마리의 도마뱀처럼 살고 싶다..’     


“폭염에는 노동자들의 안전을 위해 휴식을 한다는데... 오늘은 우리 휴밥 합시다. 외식!”     


뙤약볕 아스팔트의 열기가 식지 않아 이글이글했다. 식당으로 향하는 길을 나섰다. 목걸이형 휴대용 선풍기를 착용해도 속옷 안으로 흐르는 땀방울은 막아줄 수 없었다. 살끼리 쩍쩍 붙어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과 최대한 피해서 걸어갔다. 마스크 안 사정은 더 열악했다. 습식 사우나에 온 듯 숨이 턱턱 막혔다. 허름한 기사식당을 닮은 해장국 집의 문을 열기 전까지 그야말로 불지옥이었다.  


자리에 앉자 물수건과 얼음이 가득 채워진 플라스틱 물병이 나왔다. 중국 말로 대화를 하는 이모님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뚝배기가 따라 나왔다. 고추기름이 붉으락푸르락 화난 사람처럼 화다닥 끓고 있었다. 무더위에 바깥 활동이 어려워져 자꾸만 뱃살이 나오던터라 나는 다이어트를 결심했었지만 뚝배기 앞에서 무장해제되고 말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부추를 한 움큼 넣고 들깨가루까지 고봉으로 올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말았다. 기포가 올라오는 국물을 한 수저 엷게 떠서 후~ 불어 마시곤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이걸 안 먹고 어떻게 배겨~’

          

“강 약 중간 약약” 맛의 장단을 타듯 얼큰하고 진한 고깃국물은 강수였으며 쫄깃하며 부드러운 양과 곱창은 약이었다. 보돌보돌한 내장은 국수가락처럼 호로록 목 뒤로 넘어갔다. 찰기가 도는 흰쌀밥을 입에 넣고 섞박지를 베어 물던 순간은 차가움과 따뜻함이 뒤죽박죽 되었다. '와자작' 귓가에 들려오는 작은 천둥소리마저 귀여워 헛웃음이 자꾸만 새어 나왔다.      


다진 청양고추를 넣자 알싸함에 잔기침이 터져 나왔다. 눅진한 고기 육수에 더해진 얼큰한 맛을 자꾸 음미하다 보니 목덜미에 닿은 머리카락이 축축해졌다. 여름철 평상위에서 목에 수건을 걸고 식사하시던 어르신들이 떠올라 키득키득 웃었다. 뚝배기의 열기와 화끈함에 두 볼은 핑크빛으로 상기되었고 땀이 줄줄 흘렀다. 기분 좋은 땀이었다. 한증막이나 불가마에서 흘리듯 시원하게 땀을 흘리고서야 물통 속에 얼음을 가득 채워주는 연유를 알게 되었다.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정신이 멍~ 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 듯 개운하면서도 새로운 기분이 들었다. 아직 밖은 ‘열대야’고 도로 위에 아지랑이가 일었지만 뜨거워진 몸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에서 얼핏 가을을 느낄 수 있었다. 잊고 지낸 사실이 떠올랐다. 그토록 미워했던 땀이 실은 몸속에서 열기를 배출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는 있었다는 사실이다.


‘나를 식혀주기 위한 부단한 노력’ 어쩌면 땀은 뜨거운 여름 속에서도 삶을 사랑하기 위한 자신의 부단한 노력이었는지 모른다. 이제 그 끈끈하고 진한 사랑의 정체와 화해할 시간이다. 부지런한 땀샘처럼 혹은 얼큰한 내장탕처럼 올여름 치열하게 살아낼 작정이다. “한 겨울에야 나는 내 안에 여름이 계속 도사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알베르 까뮈가 말했다. 한 여름의 뜨끈한 추억이 오랜 시간 끓어올라 쉬이 식지 않는 감동으로 올 겨울을 든든히 버텨낼 요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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