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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각쟁이 Aug 23. 2022

당신의 여름은 어디에 남아있나요?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집다오.


“건축에는 사용에 견디는 사용가능 햇수가 있다. 보기만 하는 작품과 달리, 사람이 그 안에 들어가고, 사용하고, 조금씩 상하게 하기 때문이다...몇천 번 몇만 번 여닫는 동안 문의 경첩은 느슨해지고 이윽고 어긋난다. 배수관 끝인 목욕탕, 세면대, 화장실 부엌에는 반드시 잘못된 부분이나 고장이 생기고 노후화도 빠르다...바깥에서 들어오는 광선, 물, 바람도 집을 상하게 한다.” 소설 [여름은 그곳에 남아] 속 문장들이다. 집은 준공된 순간 건축가의 손을 떠나, 이용객과 그 시대에 의해 숨결이 부여되고 되살아난다.     


 

우리의 영혼에게도 몸을 눕히는 공간이 있을까. 그렇다면 혹 육체가 집이라는 공간이 되어주기도 할까. 우리는 태반과 함께 떨어져 세상에 나오게 된다. 그 후 어떤 영혼이 머무느냐에 따라 사람의 고유성이 결정된다. 우리의 몸과 마음에도 사용에 견디는 사용가능 햇수가 있다. 규칙적인 운동과 정확하게 계산된 의료과학에 힘입어 육체적 오작동은 손보며 살아간다. 소프트웨어인 마음의 경우 정확하게 들여다볼 수 없어 수리가 더 까다롭다. 세상으로부터 상처받고 몇 천 번을 여닫는 동안 마음이란 문에 달린 경첩도 느슨해지고 어긋난다.   


   

마음에는 눈으로 볼 수 없는 흠집이 남는다. 기대했던 사랑을 열어보고 실망하기도 하고, 무례한 사람이 보내오는 폭력적인 태도에 까지기도 한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광선, 물 , 바람 같은 자극 외에도 내부에 머무는 사람에 의해 집이 상하기도 한다. 나는 종종 자신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게 버거울 때가 있다.     



어른 손바닥으로 두 뼘만 한 다리가 축 쳐진 아이가 지쳐서 잠이 들었다. 통증 끝에 밀려오는 짜증 때문인지 아이를 툭~하고 치면 감정이 고름처럼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온종일 아이가 싸우던 대상은 눈앞에 엄마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병마였다는 걸 다 알면서도 온전히 받아내지 못하는 자신이 미웠다. 세 살 아이는 가렵고 긁으면 따가운 상처들을 보며 "매워"라고 표현한다. 매운 음식을 먹을 때 혀의 감각처럼 피부가 아리고 화끈했을 것이다. 얼굴 위로 흐르는 고름이 무서워 닦지도 못한 아이는 미간에 주름을 잔뜩 잡은 채 엄마에게 ‘살려달라’ 애원했는지도 모른다.     



강렬한 태양 아래에 꽃 피운 배롱나무처럼 온 세상에 신비로움이 만개하는 이 계절에 아이는 앓느라 바빴다. 수족구, 노로바이러스 장염, 열감기, 농가진 살아낼 만하면 또다시 아프기를 반복했다. 습한 여름밤 한 방울의 피를 노리는 모기처럼 병은 아이 옆을 따라다녔다. 고개를 돌리면 계절감이 주는 환희와 타는 듯 작렬하는 통증의 반복 속에 멀미가 차올랐다. 아이와 종이로 지은 작은 배로 저 먼바다를 항해하는 기분이 들었다. 파도는 입맛을 다시며 넘실거리고 배 안에 습기가 차오를 때면 밝은 태양이 바짝 다가와 말려주기를 기도했다. 짠내 가득 바닷바람 속에서도 가끔 고개 돌리면 막 세수를 한 파란 하늘이 세트장처럼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가슴에 고인 물기를 말리고 머릿속을 채운 모래들을 솔솔 털어내는 것. 그것 외엔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하루에도 여러 번 포기하고 싶은 마음과 붙잡으려는 마음이 내부에서 싸우는 광경이 생중계된다. 마음의 바다에는 회한이 오고 후회가 떠나면 미련이 바닥을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마치 자신과의 지지부진하고 긴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것 같다. 포기하지 않는 한 지지 않는 싸움. 미련한 나를 견뎌내는 싸움. 부족한 나를 붙잡고 안아줌으로 마무리될 싸움.


'나를 견디게 해주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 몸은 70프로가 물이 차지하고 있다. 가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인간의 몸은 모래로 지어진 커다란 성은 아닐까?’ 모래성을 쌓을 때 물을 부어주면 알갱이가 서로 결집해서 벽돌과 같은 단단함을 만들어낸다. 그때의 물은 마치 삶을 채워주는 사랑의 밀도와 같다. 단단한 모래성을 각자의 개성에 따라 웅장한 아름다움으로 서 있게 해 준다. 안이 텅 비어있던 꽉 차 있던 상관없이 결집한 모래들의 힘만으로 서로를 버티고 있다. 모래알 하나하나에는 추억이 새겨져 있다. 뾰족했던 상처들도 둥글게 마모되어 함께 어우러져있다. 모래알이 각자 하나의 마음이라면 이런 마음들을 붙잡고 사는 게 우리의 삶과 비슷하지 않을까.     



성벽처럼 단단한 모래성도 순식간에 불어오는 바람을 막을 길이 없다. 모래알이 서너 개가 먼저 날아가면 작은 실금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때부턴 거침없이 추락한다. 마음의 물성이란 게 세울 땐 오랜 시간 공을 들이지만 떨어질 땐 무너지는 모래성처럼 한 순간 같다. 바닥에 널브러진 모래들을 바라보면 속은 상하지만 ‘또 어쩌겠어..’하며 주섬주섬 꼭꼭 눌러 담아본다. 따뜻한 손바닥으로 아이처럼 토닥인다. 살다 보면 파도처럼 몰려오는 감정들로 인해 마음이 무너진다. 매 번 새로이 쌓으며 살고 있는 우리들은 각자의 모래성을 짓는 건축가 인지도 모른다.      



아이들을 바다에 데려가면 흙을 주무르고, 물을 퍼다 나르고, 두드리고 알려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놀이를 시작한다. 아이들에게는 모래성을 쌓는 일이 그저 신나는 놀이일 뿐이다. 무너지면 웃음도 파도처럼 깔깔깔 부서진다. 무너졌을 때의 경험은 다음에 반영되어 더욱 단단한 성을 지어낸다. 그런 놀이를 대하는 자세로 하루, 또 하루를 살아가면 어떨까. 너무 진지하지도 무겁지도 않게 성은 무너지면 다시 쌓으면 되니까. 아기자기한 모래 삽을 들고 커다란 안경을 올려가며 지어내는 우리들의 삶은 모두 하나의 아름다운 예술작품이 된다.      


“건축은 예술이 아니야, 현실 그 자체이지.”     



[여름은 그곳에 남아] 속 문장이다. 소설은 형체가 남지 않는 것, 사라지는 것을 진혼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 책은 사라지고 묻힌 수많은 건축가에 대한 열정을 담고 있다. 집은 넓은 대지 위에 지어진다. 우리들은 두 발로 땅을 딛고 각자의 생을 구성하며 살아간다. 그곳에서 우리는 안심하고 지낼 수 있다. 영혼이 세 들어 살고 있는 육체는 언젠가 소멸해 형체가 남지 않고 사라질 것이다. 열정적으로 살다가 사라지는 이름 없는 무수한 사람들을 진혼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사랑 이외에 또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우리의 여름은 어디에 남아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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