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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각쟁이 May 23. 2019

전지적 책벌레 시점

동화 속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어머님, 아버님 소자 오늘도 잠자리에 들러 갑니다~"


세살짜리 어린 아이가 빵빵한 기저귀를 찬 짧은 다리로 어기적 어기적 방으로 걸어들어간다. 뜨끈한 우유가 찰랑찰랑 담겨져있는 젖병을 팔에 두르고서 아기는 잘도 꿈나라로 향한다.


이런 엉뚱한 상상을 하다가 실소가 터져나왔다. 나는 지금 안자려고 버티는 아이와 두 시간째 대치중이었다.

 

아이를 무사히 잠자리에 들기까지는 일종의 의식이 필요하다. 고도로 숙련되고 발달된 영적인 의식말이다.


아이를 온종일 따라다니며 시중드는 휴일에는 필요하다면 주술이나 제물이라도 바치고 싶은 심정이다.


통목욕은 늘 정직하게도 꿀잠을 보장했다. 풀 냄새 맡으며 밖으로 쏘다니다 쨍쨍한 해님이 퇴근을 서두르면 욕조안에 뜨끈한 묘약을 찰랑찰랑 채웠다. 아이가 훌쩍 자라고 유아욕조는 어느새 엉덩이 하나 겨우 놓이는 좌욕기 신세가 되었다. 또 다른 잠 자리 의식이 필요한 시기가 다가왔다.



잠 자리는 재미있는 시간이라는 인식을 주어야 한다. 밤마다 이야기극장을 열어주기로 결심했다. 스탠드 하나로 집안의 조도를 낮추고 극장에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동화를 읽어주었다. 아빠가 베개를 휘두르며 몸으로 놀아주는 수고에 비해 입만 뻐꿈뻐꿈 거리면 되니 비교적 수월했다. 아이가  시간 즈음이면 부모에게 남은 건 실은 탈탈털린 영혼뿐이기 때문이다. 가끔 책을 읽어주다가 숨겨진 연기력을 발견하고 스스로 놀랄 때도 있다. 특히 악당역을 맡거나 불같이 화내는 장면에선 약간의 희열느끼기 시작했. 뒤늦은 재능 발견에 아쉬움이 몰려오지만 이 순간 눈을 반짝이고 듣는 아이를 위해 열연을 마친다.



혼신의 연기를 펼치다 보면 목 끝에서 타오르는 그을음이 맛이 난다. 목이 잠겨버린 것이다. 호구지책으로 양몰이개 보더콜리로 빙의되어 본다. 아이의 기분을 파악하며 요리조리 침대로 잘 몰아간다. 아이의 얼굴과 마주친 순간 무언가 다른 낌새를 감지했다. 아이의 눈빛은 혜성처럼 말똥말똥 타올랐다. 꿈나라 방문시각이 오늘도 열두 시를 넘길 것 같다.


"자~ 이제 오늘의 이야기 극장은 끝이났어요~이제 불끄고 자야지~!" 엄마는 초조하게 마지막 멘트를 끝마쳤다.


"엄마 나 혼자서 책 읽다가 잠이 오면 알아서 잘게. 엄마 할 일 해~. 나 신경 쓰지 말고. 먼저자도 되고!!" 일곱살난 딸아이가 두눈에 쌍심지를 켜고 삐딱하게 대꾸했다.


'책 읽기를 핑계로 자는 시간을 미루다니...'

 

생각지도 못했던 패가 날아왔다. 이 녀석 커서 뭐가 되려고...콧방귀를 뀌었지만 흐믓한 나머지 입가에 미소를 지어본다.


하루의 피로가 차곡차곡 쌓이듯 설거지 통엔 그릇들쌓여있었다. 잠에 취해 설거지를 하다가 우르르쾅쾅 등 뒤에서 나는 천둥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딱 마주친 아이의 눈망울 왠지 익숙했다. 동물농장에서 주인 몰래 휴지를 마구 물어다가 마주친 개의 커다랗고 놀란 눈빛이었다. 이 녀석 책장에서 책을 무더기로 꺼내어 레고처럼 쌓고 놀다가 무너뜨려 버린것이었다. 시계의 시침은 저녁 열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아랫집 아저씨가 집에서 킹콩이라도 키우는고 있는거냐며 인터폰을 눌러댈 것만 같았다.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으...은우야...괜찮아?! 이런 책 모서리가 죄다 망가졌네...책을 아껴주지 않을거면 엄마가 다음에 분리수거하는 날 죄다 내다 놓을 거에요. 얼른 들어가서 자야지. 이 시간에 뭐 하는 거니~"


송골송골 맺힌 눈물과 땀이 채 마르기도 전에 아이는 꿈나라에 착했다. 쌔근쌔근 숨을 내쉬는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모두들 입을 모아 극찬하는 천사 같았다. 마지막까지 다정하지 못했던 못난 어미는 후회의 마음 한 점을 고해성사해보았다.


'아기 천사님 엄마의 마음도 조금만 이해해주세요...' 


살짝 열어둔 방문 틈으로 거실의 노란 빛이 바닥에 기다란 세모를 그리며 들어왔.


갑자기 그 불빛이 사뿐사뿐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 illustrated by Hyunhee Kim ]



거실 밖을 조심스레 내다보았다. 바닥에 제각기 널브러져 있는 책들 사이로 초록빛 물체들이 꿈틀거렸다.


정체불명의 초록색 생명체는 나뭇잎을 갉아먹어 오동통하게 살이 오른 애벌레를 닮았다. 그중에는 뱀처럼 똬리를 틀고 편안히 앉아있는 녀석도 있었다. 그들끼리 정신없이 이야기를 주고받느라 누군가 지켜보는 줄은 꿈에도 모를것 같았다.


부지런히 책을 읽는 어린이들에게만 찾아온다는 책벌레였다. 그들이 찾아와 꿈과 모험의 세계로 데려가 준다는 동화책에서 읽은 것 같았다.


'요즘에는 다 큰 어른이들에게도 찾아오나...별일이 다있네...'



<책벌레들의 수다>



"얘들아~ 너네 아기돼지 삼형제에서 활약하던 그 늑대 기억나? 돼지들의 집을 후~~ 불어서 날려버리곤 막내 돼지의 집에서 끓는 물에 엉덩이를 댄 후 사라졌잖아. 알고 보니  친구 송곳니를 앙 물고 공부했더라. 몇일 전에 신문에서 건물의 안전을 진단하고 보강해주회사로 대박  사장님이 소개되었는데... 아 글쎄 사진을 보니  그 늑대였어지. 엉덩이 털을 잃고 난 후 새로운 인생을 선물 받았다나. 그동안 괴롭혀왔던 미안함 때문인지 돼지들을 위한 건축 봉사를 다시 시작했다네."



"뒤늦게라도 정신을 차렸다니 다행이다. 우리 이야기 속 공주님과 비슷하네. 매일 높은 탑 안에 갇혀서 왕자님만 기다리던 공주님이 어느날 갑자기 달라지셨거든. 무슨 생각인지 스스로 성을 탈출하셨지. 그 무겁고 기다란 금발의 머리카락도 나이프로 끊어냈어. 답답했던 탑에서의 생활을 보상이라도 받듯이 전 세계를 여행다니며 지금은 여행전문 기자로 일하고 계셔. 얼마 전엔 맹그로브 숲을 경비행기로 비행하다 찍은 사진을 보내왔는데...온통 진녹색의 브로콜리들이 바다에 둥둥 떠있는게 장관이더군. 이젠 스스로의 힘으로 자유롭게 살아갈 거래! "


[ illustrated by Hyunhee Kim ]


"차라리 혼자 사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우리 신데렐라 이야기속은 지금 난리도 아니야. 왕자님이 클럽 파티에서 신데렐라의 얼굴만 보고 혹해서 결혼했잖아. 궁밖에 살던 낯선 여자라서 유난히 더 설레고 그랬나봐. 결혼하고 나서 숨겨둔 성격이 점점 드러나기 시작했어. 눈덩이 처럼 불어나던 낭비벽은 점점 심해져서 새로 나온 호박마차를 사기 위해 카드로 돌려막이를 해댔지. 우리 눈엔 다 똑같은 마차였는데 그 커다란 마크 하나 달았다고 미천한 출신이 보상되는 기분이었나 봐...결국 왕실의 재정과 함께 파경을 맞은 왕자님은 이번엔 숲에서 만난 공주와 결혼을 하셨. 그런데 이 공주님은 잠이 많아도 너무 많아. 일어날 생각을 안 한다는구먼..."



"우리 이야기속 공주님도 그 숲에서 살고 계셔. 함께 사는 난쟁이들이 숲에서 나무를 하다가 신비의 약초를 찾아냈지. 공주님은 그 성분으로 화이트닝 화장품을 개발하셨어. 워낙 달빛처럼 하얗기로 명성이 자자한 공주님이셨지. 전국에서 그분을 따라 하고싶어하는 사람들이 화장품을 사들이기 시작했. 가끔 화장품을 바구니에 담아 직접 문을 두드리며 찾아가는 방문판매도 다니셔."


"그렇구나~ 너희 공주님에게 독사과를 먹이려고 문을 두드렸던 그 지독한 왕비는 어떻게 되었어?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쁜지만 집착하던 왕비님말이야...혹시 성형에 중독된 거 아니야?"


"아이고~너 요즘 유뷰드에서 유명한 왕비할머니의 화장법 아직 못 봤어? 말도 마. 젊은 애들이 할머니가 나와서 화장하는 모습이 참 신선하다나...옛날 화장법인데 묘하게 중독된다며 엄청난 팬덤을 거느리고 있어. 왕비 할머니 덕분에 초등학생들의 장래희망에 뷰티 크리에이터가 빠르게 추가되고 있대. 동화책에서는 누리지 못했던 아이들의 인기를 싹싹 긁어모으고 계시. 고독한 악역은 벗어던지고 이제야 맞는 옷을 입은 듯 편안하게 여생을 즐기고 계셔. 사실 알고 보면  사랑스러운 할매야~"


  



'저기 푸르댕댕한 번데기들이 앉아서 수다를 떨고 있는 걸 듣다 보니 아마도 이곳은 내 꿈속인가 보다...'


방문을 박~차고 거실로 돌진해 나갔다. 용기내어 등을 켜보았다. 책 표지에 걸터앉아 있거나 기어다니 던 책벌레들은 이내 노랗고 푸르댕댕아지랑이들로 변하며 희미하게 사라져갔다. 마치 한 여름 아스팔트 위의 신기루 같았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거실 스위치를 딸깍 내리고 다시 아이 곁으로 돌아왔다. 아이의 올록볼록한 콧방울을 쓰다듬으며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동화  이야기에는 그 끝이이 있지만 사람들의 복잡하고 다양한 이야기 속에도 정해진 목적지가 있을까...'


인생의 길은 끝이 없기에 살면서 마주하는 기쁨과 좌절 순간을 섣불리 판단하는건 너무 어렵다... 아마도 지하에 계신 그분이 빨간펜으로 누군가의 이름을 적기 직전까지는 생과 삶은 새로운 결말을 계속해서 써내려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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