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판다는 이른 아침부터 화장으로 분주합니다. 판다는 명주천에 목화솜을 넣어 둥글게 감싸 쥐었습니다. 벼루의 찰랑한 먹에 담궈 눈과 귀 주위를 거뭇거뭇 물들입니다. 그때였습니다. 잘 익은 방울토마토처럼 새빨간 무당벌레가 포르르 날아오르며 말합니다. "판다야 내 엉덩이에도 좀 찍어줘라...학교에 늦었거든!" ]
"은유야~~ 동화책 다 봤으면 얼른 학교 가야지! "
2026년 미래의 한국. 은유는 어느새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다.
그전과 달리 변한 게 있다면 재작년부터 공공장소에서 화장이 의무화되었다는 점이다. 법적 효력은 성별을 따지지 않는다. 글로벌한 선진 문화를 구축하자는게 첫 번째 이유였고 두 번째는 점점 무차별해지는 성형을 막기 위함이었다. 작은 두상이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얼굴뼈를 깎는 성형을 받다가 사망하는 일이 빈번해지자 정부가 발 벗고 나서게 되었다. 출산율은 빠르게 절벽으로 곤두박질 치고 있었다.
[성형금지. 공공장소 화장 전면 도입화.]
그 옛날 시절에는 화장이 선택이었다. 은유를 출산한 지 얼마 안된 시점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참으로 범법자 같은 생활들이었다.아기에게 혹여 화장품이 묻을까 걱정으로 시작된 맨얼굴은 어느새 생활이 되어갔다. 그 시절 나는 수치심을 모르는 정글 속 원시인처럼 쌩얼로 동네를 마구 휘젓고 다녔었다.
아기를 양육하며 뜨거운 모성으로 창피함을 삼켜내야했다. 젊음을 상징하는 화려한 인맥과 굽 높은 하이힐에서 내려오자...매일 마주하는 건 남편 아니면 어린이집 선생님이 전부였다. 두터운 아기띠를 두르고 (아기띠 보다 좀더 두터운 아기도 두르고) 양손에 과일과 양파를 잔뜩 움켜쥐고 돌아오는 시장길에는 인신공격도 어렵지 않게 당했었다. "어이~거기 아줌마 비켜!","애엄마가 뭐저리 싸돌아다녀..애랑 집에나 쳐박혀있지! 아~비켜!" 지금 돌이켜보면 참 아찔하다. 아줌마 혹은 아저씨라는 호칭은 암묵적으로 사회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난 중년 남녀를 비하하던 언어로 지금은 사용이 철저히 금지되었다. 자칫 잘못 사용했다간 태형으로 엉덩이가 너덜너덜해질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대학 시절 추억만큼 희미해져가는 동기의 결혼식날이 다가왔다. 오랜만에 손에 잡는 화장도구가 참 낯설었다. 달리는 말 위에서 스모키 메이크업을 마치고 속눈썹까지 찝어 올릴 수 있는 화려한 화장실력은 무용해졌다. 화장품 파우치 속 립과 아이쉐도우의 색들은 왜 이리도 고생창연한지...요즘 유행하는 컬러에 둔감한 색맹이 된 것만 같았다. 평소보다 더 오랜 시간 공들여 화장을 끝내고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도저히 이러고는 집 밖을 나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마침 창밖에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고 심신미약자로 오해받고 싶진 않았다.
[ illustrated by Hyunhee Kim ]
< 미래의 화장법 >
그토록 바라던 미래가 현실이 되었다. 요즘은 자동분사 스트레이가 달린 화장 마스크를 착용하기만 하면 된다. 아이언맨 마스크처럼 둥근 마스크를 씌우면 얼굴 곡선과 이목구비를 인식해서 자동으로 화장품을 분사한다. 마스크에는 시간과 장소에 적합한 선택 모드가 있다. 자연스러운 일상용, 화려한 파티용, 학부모 상담용, 남성용, 면접용, 상갓집용 등 다양한 모드를 고르기만 하면 어울리는 얼굴이 완성된다.
출근 한 시간 전에 일어나서 화장을 시작하던 시대가 막이 내리고 지금은 일분이면 된다. 여름철 강렬한 자외선으로 인한 피부암을 막아주고 "워터푸르트" 기능을 추가하면 물따귀를 맞아도 쉬이 망가지지 않는다.
내년에는 거꾸로 젊어질 수 있는 "동안 기능"이 새로 출시된다고 한다. 마스크에 신소재 3D 프린터를 결합한 신기술이라고 한다. 한창 아름다운 시절의 얼굴을 인식시켜놓으면 더 이상 추하게 늙어가는 모습을 남에게 들키지 않아도 된다. 발끝에 걸려 넘어질 듯 움푹 페인 주름살 위로 새로운 피부가 뿌려질 것이다. 문제는 비용이다. 우리집 아파트 전세 보증금을 다 빼낸다 해도 사지 못할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그렇게 된다면 아마도...대중들의 얼굴은 고된 노동으로부터 버텨낼 술과 담배로 점점 늙어갈 테지만 부자들의 얼굴은 화려한 욕망으로 가득 채워질 것이다.
[ illustrated by Hyunhee Kim ]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기까지 여유가 남았다. 과일을 사러 잠깐 집 앞에 걸어나갔다. 요즘은 살아있는 동물을 제외한 모든 물건은 물류화되어 생산지에서 집으로 당일 아침 배송이 가능하다. 아쉽게도 직배송되는 과일들의 맛은 널을 뛰듯 들쑥날쑥하다. 아빠의 부른 배만큼 거대하고 초록 줄무늬가 뚜렷한 수박을 똑똑 두드려보고, 참외 꼭지의 단내를 맡아가며 직접 고르는 옛날 방법은 아직 요긴하다. 영롱한 마녀의구슬 같은 샤인 머스켓 한 알을 떼어먹다가 무심코 담는 날이면 지갑을 통째로 줘버리고 오는 위험성도 감안해야 한다.
외출 준비가 끝나가는데 아무리 뒤져봐도 화장 마스크가 보이질 않는다. 귀신이 장난을 친 건 아닐 테고. 곰곰히 기억을 되짚어 본다. 어느날 새벽녘이었다. 마스크를 사용하곤 아무 데나 던진 남편이 발 없는 귀신처럼 홀연히 나가버렸다. 서로 마스크를 차지하기 위해 대판 싸웠던 기억이 스친다.
마스크는 해가 갈수록 점점 진화해왔다. 지중해 빛에 적절히 그을린 이태리 남성의 피부톤과 눈동자에 맞춘 천연색소를 눈썹에 분사하는 설정도 가능해졌다. 이제 아빠들도 마취크림을 바른 채 바늘 앞에 누워야 하는 남성다움의 상징인 송충이 눈썹 문신에서 해방된 것을 의미했다.
남편과 함께 화장을 시작 한 후로 이런 갑작스러운 분실을 준비해두었다. 그것은 바로 황사마시크였다. 두개의 눈만 빼고 얼굴 전체를 다 가리는 특수천으로 제작된 마스크. 황사와 미세먼지 지수가 극에 달하는 봄철이면 얼굴 전체를 다 가리지 않고 외출이 불가능하다. 잠깐 과일만 사들고 돌아오면 되니까 맨얼굴을 일단 숨겨보기로 하자.
<과일 가게>
" 저~뒷 줄 바구니에 있는 참외 3호 주세요. 토마토 한 상자는 솎아내서 상태 안 좋은 건 바꿔주시고요. 또..."
"어머나,,, 은유 엄마 아니에요? 은유는 요즘 학교 잘 다니고 있나요. 너무 반갑다. 저기 앞에서 커피 한 잔 하고 가요."
오늘 하루는 투명인간이고 싶었다. 작전은 실패했다. 은유랑 같은 유치원을 나왔고 같은 반에 반장이었던 해솔이 엄마였다. 이렇게 표현해서 참 미안하지만 그녀는 거대한 거미줄에 걸린 먹이는 절대 놓지 않는 거미여왕 같은 여자이다. 몇 학년 몇 반 누구를 이야기하면 사는 곳은 몇 단지이고 아빠 직위와 집안 인테리어풍까지 술술 나오는 거대한 빅데이터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녀의 거미줄에 걸려든 것이었다. 섣불리 만남을 거절했다가 엄마들 정보망에서 소외당하면 그 날로 학교 생활은 끝장이다.
"아휴~잘 지내셨어요? 올해는 아무리 찾아봐도 해솔이 만한 친구가 없네요. 커피 좋죠. 제가 한 잔 살게요."
당당히 앞 장 서며 커피숍의 육중한 유리문을 기대어 밀었다. 나른한 오후시간이라 사람들로 북적였다. 마침 창가에는 제법 푹신해 보이는 팔걸이 소파가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이제 곧 여름의 시작을 알리기라도 하는듯 코와 인중에서 땀이 송골송골 뿜어져 나왔다. 뜨끈한 사이라도 되는냥 얼굴위에 마스크가 쩍쩍 달라붙었다. 에어컨에서 용의 입김처럼 시원한 냉기가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냉기가 반가워진 나는 문득 팔을 들어올리며 시원하게 마스크를 벗어던졌다.
그 순간 무언가를 돌이키기에 늦었다는 예감이 들었다. 커피숍 안에 있는 뜨거운 시선들이 내게 날아와 꽂히고 달아오른 나의 얼굴은 이내 괴로움으로 일그러졌다. 나는 오늘 화장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표정에서 뭔지 모를 역겨움과 혐오감이 비춰진다. 그 뒤엔 목소가 새어 나오는 듯했다.
'저 여자 지금 맨 얼굴로 밖을 나온 것 실화임?'
'윽 미개해 땀범벅에 같은 여자가 봐도 천박하다.'
'부모한테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았길래 저 모양이래. 공공장소에서 기본적인 예의도 모르나 쯧쯧...'
해솔이 엄마의 기에 눌려 차마 생각하지 못했다. 공공장소에 들어가게 되면 황사용 마스크를 벗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도모르게 모든게 엉망진창이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알 수 없는 증오심이 불타올라와 점점 뜨거워졌다.
<엄~~마!! 일어나~~악!!>
약이 바짝 오른 은유가 씩씩거리며 내 몸을 기우뚱~ 흔들어 대고있다. 천근만근 무거운 눈꺼풀을 치켜올리며 바라본 머리 위에는 백열전구가 달린 스탠드가 밝게 비추고 있었다. 빛의 열기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가슴 위엔 누군가 이불이라도 덮은 듯 판다 동화책이 엎어져 있다.
"엄마~ 일어나! 잠깐 눈만 감는 다더니...내 동화책 읽어주다 먼저 잠들어버리는 게 어딨어!!!!"
은유가 분에 못이겨 씩씩 거리자 나는 또다시 창피해졌다. 뺨위를 흥건히 적신 침을 조용히 닦아내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