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주민등록 등초본을 발급받았다. 용지 위에 전입신고 기록들이 까만 글씨로 빼곡히 2장 채워져 있었다. 스무 살까지 한 군데서 나고 자랐으니 성인 이후 스무 해의 흔적들이었다.
처음 스무 해의 기억은 이층 양옥집으로 점철되어 있다. 부모님이 결혼 후 처음 마련하신 주택에는 아담한 마당과 테라스가 딸려 있었다. 마당 아래에는 사계절 서늘한 김장독을 묻어 두고 위로는 포도나무와 앵두나무를 심었다. 열매를 맺기 시작하던 첫 해에 참새들이 방앗간처럼 드나들었다. 겨울이 오면 강아지 먹으라고 써준 죽에 참새들이 동냥을 오기도 했다. 어느 날은 지하대피실에 고양이가 빠지기도 했다. 목탄처럼 까만 고양이를 꺼내어 씻겨주니 흰 얼룩 고양이라서 가족끼리 한참을 웃었다. 봄이면 옆집에서 꺾어준 개나리 한 줄기가 번져 담벼락을 도배하고 여름이면 평상을 만들고 앉아 수박을 퍼먹으며 방학숙제를 했다. 그때의 집은 영혼을 누이는 곳이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어느 날 사람들은 그곳을 밀고 아파트가 들어온다고 했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아파트에서 가족들은 이제 더 행복한 날들을 보장받을 거라고 했다.
성인이 되고 난 후 나는 취업과 결혼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살았다. 장이 열리는 곳마다 떠돌아다니는 장돌뱅이 같은 삶에도 은근한 매력이 있었다. 인생을 여행하듯 살다 보니 이방인처럼 사는 삶은 압박감이 적고 단촐했다. 한 곳에서 이 삼 년 지내고 나면 새로운 곳으로의 발령이 은근한 기대감으로 채워졌다. 문제는 자녀들이 커갈수록 나타났다. 새로운 학교와 동네로 이사를 반복할수록 아이들은 심리적 고향을 잃어갔다. 경제 사정이 맞는 곳을 찾아보다 신도시에 아파트를 구입하고 정착했다.
경기도에 사는 지금도 가끔 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간다. 사대문 안에 있던 떠나온 고향은 어느새 빌딩 숲이 되어있었다. 고급스러운 소나무로 힘을 준 조경 속에는 더 이상 개나리가 타고 오를 아담한 벽이 없었다. 커다란 옹벽과 건물들이 마치 식은 고깃덩어리처럼 차가웠다. 빽빽한 빌딩 숲으로 변한 고향에 세워진 집은 컨베이어 벨트 위를 지나는 레고조각처럼 비슷했다.
결론적으로 지금 나는 또 다른 레고 조각에 살고 있다. 국민평형으로 제시된 방 셋에 화장실이 둘인 아파트이다. 몇 동 몇 호로 이름을 부여받은 이곳에서 스스로 고를 수 있는 건 남동향이냐 남서향이냐 정도였다. 겨울에는 외풍이 없어 따뜻하고 중앙난방이라 뜨거운 물이 바로 나오는 미래형 공동주택에서 '몸'은 편안했다. 따스함과 편안한 날들 속에서 여전히 나에겐 돌아가고 싶은 집이 따로 있었다. 이 행복의 정착지에서 이상하리만치 '정신'은 자꾸만 밖으로 떠돌았다. 발끝이 꽁꽁 언 채로 커다란 철대문을 열고 이층 양옥집에 들어서면 온돌을 디디는 따스함이 배가 된 시절이 아직 기억에 생생흐다. 온 가족이 두꺼운 이불 위에서 생선처럼 쪼르르 누워 잠들던 그 '집'에는 세월의 역사가 계절별로 세겨져있었다. 꿈에서 나는 지도 위로 사라진 그 공간 속으로 자꾸만 걸어 들어갔다. 스스로에게 이유를 물어야 했다. 사람에게 살아가고 싶은 집이란 어떤 공간일까.
집은 사람이 들어가 살기 위한 물리적인 공간이다. 때로는 그곳에 사는 가정을 의미하며 심리적인 고향이 되어주기도 한다. 얼마 전 이케아에서 "집에서의 생활"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한국사람의 40%가 집에서 '혼자인 시간이 좋다'라고 대답해 항목별 전 세계 1위를 차지했다. 과거 유교문화 속 한국인에게 집이란 구성원 간의 압력으로 자율성이 부족했음을 보여주는 결과이다. 개별성을 존중하며 변해가는 이 시대에 어떤 집이 필요할까.
지금 우리 사회는 점차 개인화와 파편화가 빠르게 진행 중이다. 1인가구의 증가세와 함께 아이를 낳지 않는 딩크족이나 입양 가족 혹은 가족이 아닌 이와 주거공간을 공유하는 셰어하우스가 증가하고 있다. 또한 자녀세대가 독립하지 않고 함께 사는 신 캥거루족이나 마음이 맞는 이와 함께 집을 짓고 사는 돌봄 공동체가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가족의 모습이 다양해지면서 집에 살아가는 가족의 범위가 점차 확대되고 있다. 수직적 구조이던 유교사회가 점차 수평적으로 바뀌어가며 '평등한 관계와 건강한 연대' 욕구가 증가하는 추세이다.
이처럼 집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치관과 라이프스타일이 점차 다양해지고 있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욕구 또한 세분화되었다. 사람은 얼굴 생김새부터 홍채나 지문까지 전부 다르다. 타고난 성향이나 취향 혹은 살아온 문화 역사적 배경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 틀에 찍어낸 듯한 아파트에서 비빔밥처럼 살아간다. 그곳에서 심리적 고향을 찾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때론 좌절되기도 한다. 미래 세대에게 아파트만이 답이 될 수 있을까.
공간은 무언가를 담는 곳이다. 집은 자신을 나타내는 아이덴티티가 되기도 한다. 주인을 닮은 공간을 짓고 변형하며 스스로 가꾸고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나라 사전에 '자주'라는 말이 있다. 자주(自主)란 타인의 간섭 없이 자신의 주장대로 함을 말한다. 또 다른 의미에서 자주(自做)란 자기가 스스로 만들거나 지음을 의미한다. 동물에게 있는 귀소본능처럼 멀고 낯선 곳에서 되돌아갈 수 있도록 자신만의 고유성을 가진 집이라면 좋겠다.
집은 기억과 추억으로 버무려진 역사성을 띄는 공간이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 주인이 되며 가까이하고 싶은 이웃을 곁에 두며 집과 함께 늙어가는 곳. 그런 곳이라면 비로소 언제든 돌아가고 픈 고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어느 동네에 사느냐가 점차 명함이 되어가는 콘크리트 유토피아 속에서 진정한 고향을 찾으려는 개개인들의 노력들은 성숙된 주거문화로 나아가는 단추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떠오르는 물음들에게서 작은 기대감을 가져본다.
(사진 핀터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