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니 할머니 약방.

이상한 드링크제.

by 지각쟁이


우리 동네 사람이 다니지 않는 작은 귀퉁이에 작은 약방이 문을 열었다.


얼핏 보면 화원인가 착각할 정도로 약방은 식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푸른 잎사귀와 무질서하게 얽혀있는 덩굴들이 바람에 흔들릴 때면 약방은 마치 살아서 숨을 쉬고있는 듯 보였다. 구십 세는 족히 넘어 보이는 등이 굽은 할머니가 화초에 물을 주고 있었다. 유난히 백옥처럼 희고 커다란 틀니를 혀로 훔치며 마른침을 바르고 계셨다.


"할머니 누가 보면 약방인지 화원인지 헷갈리겠어요. 허리도 굽으신 양반이 화초 가꾸기 안 힘드셔요? 약방에 식물이 왜 이렇게 많아요?"


할머니의 쭈글쭈글한 입술이 오물오물 말하기 위해 시동을 걸고 있었다. 그때였다. 약방 안쪽에서 큰 키의 남자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나오고 있었다. 반짝이는 안경을 쓴 묘한 분위기의 남자에게서 온유함이 감돌았다. 그는 습관처럼 소매를 걷어 올리며 말했다.


"약용 식물들이에요. 저희 약방에는 시중에 판매되는 약도 팔고 있지만 그 중 몇 가지는 직접 만든답니다. 어머니가 소일거리 삼아 제 일을 도와주고 계세요."


[ illustrated by Hyunhee Kim ]




할머니의 굽은 등을 보자 문득 울 엄마의 좁은 등이 떠올랐다.


병원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힘없고 작은 울 엄마의 등. 계속 되는 수액 처방으로 퉁퉁 부어버린 낯선 사람 같았던 그 손은 힘겹게 제 몸을 받치고 있었다. 그동안 엄마는 아빠 없이 우리 사형제를 키우시느라 아플 새도 없으셨다. 광주리에 상인들이 먹을 주먹밥과 떡을 담아가서 부지런히 팔다가...나중에는 본인의 젊은 시절도 전부 시장에 내다 파셨다. 그런 고단한 인생을 술로 신세한탄 한 번 해본 적 없던 우직하고 정직한 엄마는 아이러니하게도 간암 판정을 받으셨다.


엄마의 병간호로 맞벌이에 아이들을 키우며 불판 위의 메뚜기처럼 이리뛰고 저리뛰던 자식들은 순번을 정해가며 병원을 지키고 있었다. 어젯밤 엄마는 처방받은 약의 부작용으로 침대에서 누운 채로 실례를 하셨다...얼른 목욕을 시켜드린 후 시트를 갈고 새 옷으로 입혀드리는데 누군가를 돌본다는 일이 점점 힘에 부치는 것을 느꼈다. 그때 등 뒤로 조그만 말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얼른 가야겠어.. 내 자식들 고생시키는 꼴은 두고 볼 수 없지... '


집에 돌아온 다음날 아침 커다란 망치로 후려친 듯한 두통이 밀려왔다. 은유를 등원시키고 새로 생겼다는 동네 약방으로 달려왔다. 약방 안을 둘러보니 손에 쏙 쥐어지는 유리병 드링크제가 눈에 들어왔다.


"효능. 당신의 고단함을 잠재워 드립니다." 한 병을 챙겨 들고 카드지갑을 꺼내며 계산대로 향했다.


계산대 위에는 곰돌이 모양의 일회용 밴드들이 알록달록 귀여움을 뽐내고 있었다. 밴드를 보자 은유의 까진 발뒷굼치가 떠올랐다.


아이는 어릴 적부터 무심코 입혀주는 고무줄 쫄쫄이 바지도 늘 자랑스럽게 여기며 동네를 돌아다녔다. 유치원에 입학하고나자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의 화려한 드레스와 반짝이는 구두에서 매혹적이고 신비로운 마력을 느꼈나보다. 첫 구두를 신고 놀이터 탐험을 끝내고 돌아오던 날...뒤꿈치와 엄지발가락은 붉은 생채기 투성이였다.


"효능. 어디든 붙여만 주세요. 상처 입은 당신을 치유합니다."


아이의 신발 안에도 붙여주고 자주 가던 아이스크림 가게의 욕쟁이 초등학생들 입에도 붙여줘야겠다... 싶은 마음에 반신 반의로 밴드 두 통을 사들고 돌아왔다.



오전의 선명한 색채가 사라지고 은은한 노랑 불빛만이 내려앉은 저녁시간이다.


식탁 위에는 촉촉한 유부의 속을 잡채와 두부로 통통하게 채워 미나리로 묶은 어묵탕이 끓고 있다. 오늘은 은유의 삼촌이 놀러 왔다. 은유는 밥을 먹다 말고 삼촌이 사다 준 선물의 포장지를 뜯는 재미에 푹 빠졌다. 우리 부부는 갓 제대한 삼촌의 이야기가 올라온 잘 차려진 저녁상을 즐기고 있었다.


신나게 떠들던 삼촌의 얼굴엔 점점 막연한 불안감이 떠올랐다.


"형, 지난 2년이란 시간이 마치 꿈꾸던 긴 밤속에서 깨어난 것 같아. 복학 전에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면접을 보는데 그것도 쉽지가 않네...다들 전에 무슨 일을 했냐고 묻더라고. 자랑스럽게 나라를 지키고 돌아왔습니다! 그랬더니 이 년 전이랑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져서 어차피 처음부터 다시 배우셔야겠네요... 하더라. 바리스타 자격증만 없을 뿐이지 스무 살 때부터 굳은살 박이게 해온 일이었는데.. 하는 수 없이 쌓인 커피잔을 닦고 정산까지 해야 해서 다들 피하는 밤늦은 마감타임으로 지원하고 돌아왔어. 잠시 동안 세상에서 사라진 유령이 된 기분이 들더라고...알고 지내던 사람들에게 내 존재감도 그와 마찬가지겠지... "


삼촌은 시선은 떨구고 애꿎은 손목 위의 전자 시계를 만지작 거렸다. 맥반석 계란처럼 잘 구워진 피부에 개성파 배우를 닮은 은유의 삼촌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 아이를 등원시키고 들렀던 커피숍이 떠올랐다. 훤칠한 큰 키를 닮아 긴 손가락을 지닌 젊은 바리스타는 미소를 머금은채 마른 수건으로 유리잔을 문질러 닦고 있었다. 곱슬곱슬 자연스럽게 말아놓은 웨이브 머리에 크로와상처럼 올라간 베레모가 어릴 적 순정만화의 남자 주인공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그가 내려주는 커피를 받아 들며 못된 짓을 한 어린아이처럼 나의 볼이 붉으락 푸르락 거렸다. 모두들 공유하고픈 화제의 커피 프린스. 그가 일하는 커피숍은 사람들로 어느새 만원이었다. 순간 삼촌에게 미안함이 밀려왔다. 세상으로부터 받은 상처로 속이 쓰린 은유의 삼촌을 위해 내일 약방을 들러 드링크제를 선물해야겠다...


[ illustrated by Hyunhee Kim ]



<다음날 아침>

어젯밤 마시고 잔 드링크제 덕분인 걸까.


오랜만에 열탕 속에서 뜨끈한 찜질을 한 듯 개운한 아침이다. 약효가 생각보다 좋았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약방에 들렀다. 이번에는 누군가 뒤를 이어 들어왔다. 얼마 남지 않은 머리가 이마 위에 엉겨 붙은 중년의 아저씨가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유를 모르겠고 자꾸만 숨 쉬기가 힘들며 가슴이 갑갑하다고 했다. 약방 주인은 언제부터 증상이 시작되었는지를 물었다.


" 회사를 그만두기 직전부터 시작된 것 같아요. 전 평생을 퇴직할 날 만 바라보고 살아왔거든요. 정작 그리 바라던 퇴직의 날이 다가오자...내 자신이 모던타임스 속 부속품처럼 느껴지더군요. 늘 회사에서 밥을 먹었어요. 퇴근하고도 회사 사람들만 만났죠. 저녁에도 회식이 이어졌거든요. 일얘기도 하고 외로움도 풀고 그러는거죠. 점차 함께 일하는 팀원들이 가족처럼 느껴지더군요. 정작 내 가족은 무얼 하며 사는지도 모른 채 말이죠. 드디어 마지막 날이 다가왔어요. 사무실 한 켠의 자리는 나의 부재가 티가 날 새도 없이 새로운 부품으로 채워지더군요. 종이 한 장으로 내 모든 설명을 대신하던 명함도 사라졌어요. '그래, 이제부터라도 가족들과 행복하게 잘 살아보는거야!'하고 생각했죠.


한 평생 자식들을 키우느라 본인의 삶을 지워가던 아내는 뒤늦게 꿈을 찾아 실버 일자리에 취직하더군요. 아내를 응원해주고 싶었어요. 아이들은 친구 만나러 간다며 용돈을 타가곤 늦게까지 문자 한 통 없어요. 슬슬 넘쳐나던 자유가 외로움으로 옷을 갈아입더군요. 어딜 가도 끼기 힘들고 꼰대 같다는 소리 듣지 않으려고 일부러 더 노력했지만 살아온 습관을 벗어내는 게 쉽지 않더군요. 계속되는 생활의 따분함 속에서 점점 방향을 잃은 채 표류하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원인모를 통증이 시작되었어요... 이제 이 약방의 드링크제 아니면 아무 약도 듣질 않네요."


아저씨의 바다 같은 감색 눈동자 속에는 얕은 파도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에게 뿌리 박힌 슬픔은 마치 그의 잘못이 아니라 항변하는 것 같았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그를 그렇게 살게 내버려 두었던 사회의 잘못 같은 것 따위 말이다.


"아저씨.. 저 이거 한 병 받으세요. 제가 여유 있게 샀거든요. 저희 시골에 있는 큰 오빠를 참 닮으셨어요...참 인자하신 분이시거든요. 아저씨를 보니 우리 큰 오빠가 생각나네요..."




계산을 마치고 약방을 걸어 나왔다.


검은 봉지 속에서 유리병들이 짤랑짤랑 부딪치며 방울 소리를 냈다. 할머니는 약방 앞 공터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는 고무호스를 들고 장독을 닦고 계셨다. 그 옆엔 갓 채워져 찰랑찰랑한 드링크제들이 주르륵 열을 맞춰 진열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순간 궁금증이 밀려왔다.


마술사의 비밀을 파헤치려는 비장한 표정으로 할머니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물었다.


"할머니 혹시 이 드링크제 뭘로 만드신 거예요? "


"아~ 고거? 술이야 술! 이 장독들 안 보여? 내가 담근 약술인데 아들놈 몰래 타봤제.... " 할머니는 철부지 어린아이 시절로 돌아간것 마냥 깔깔깔 웃기 시작했다. 덕분에 틀니가 아슬아슬 입밖으로 탈출을 시도 중이었다.



"깔깔깔깔~ 고거이 뻥이라우~ 이 할미의 농에 넘어갔수? "



"요놈 장독은 어떤 재료를 담궜느냐에 따라서 용도가 달라진다우. 장독에 나있는 미세한 구멍 때문에 재료의 향기와 독성이 배기 마련이거든. 요즘 사람들은 생각이 너무 많은것 같어. 아니 사람들이 늘 생각을 채우기만 하고 비우는 건 생각을 안 하니 내가 도와줘 본거라고. 잦은 걱정과 불안이 계속 쌓이면 나중에 좋은 재료를 담을 수 없게 되는 법이지. 내가 담근 약초들로 잠이 솔솔 오는 성분을 넣었다오. 때론 너무 많은 생각 보단 달콤한 잠 한 조각이 도움이 될 때가 있다우."




할머니의 말을 듣고 약병을 돌려 뒷면을 보았다.


주의사항. 지나친 생각은 정신건강에 해롭습니다.

미녀 틀니 할머니표. 그럼 또 오슈.


[ illustrated by Hyunhee Ki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