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 가전.

길가에 내다 버리지 마세요.

by 지각쟁이



<2029년 은유네 집 풍경>


나는 여러 명의 엄마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내가 명령만 내리면 다들 달려와 척척 도와줍니다.


날마다 새로운 요리를 연구해주는 엄마, 침대와 장롱 밑까지 들어가 먼지를 마셔주는 엄마, 시험에 잘 나오는 유형의 문제들을 짚어 정리해주는 엄마, 음식을 들고 날아다니는 엄마... 그중에서도 최고의 엄마는 바로 밤에만 들어오지만 나와 똑같은 냄새를 지닌 보드라운 살결의 우리 엄마입니다.


엄마는 요즘 너무 바쁘답니다.



' 냉장고가 안 열린다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나른함과 배고픔이 함께 아우성치는 오후가 됩니다.


나는 냉장고로 달려가 두 팔에 힘을 주어 손잡이를 당겨 봅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일까요. 냉장고 문이 안 열립니다. 엄마는 얼마 전 올챙이처럼 볼록한 내 뱃살을 보며 냉장고에 허용 체중과 체지방을 입력해 두셨습니다.


우리집 냉장고의 발판에는 몸무게 센서가 달려있습니다. 허용 체중을 초과하면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걸 깜빡했습니다. 어젯밤 먹은 케이크를 다시 토해낼 수도 없고 뱃속의 아기 괴물은 먹을걸 내놓으라고 꿱꿱~ 소리치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지요. 모양새는 좀 빠지나 최후의 수단을 써야겠습니다.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난 나는 개구리처럼 쪼그려 앉아 도약을 준비합니다. 알이 배긴 종아리에 잔뜩 힘을 주어 점프한 후 냉장고 손잡이에 개구리처럼 찰싹 매달리는 것입니다. 마치 파리끈끈이에 붙은 파리처럼 말이요. 3초를 후 철컥! 소리와 함께 잠금 버튼이 풀렸습니다.


'메롱~엄마도 요런 방법은 몰랐겠지~' 아무리 똑똑한 가전들이라도 가끔은 앞니가 하나쯤 빠진 바보들 같습니다.


냉장고에서 성공적으로 간식을 꺼냈습니다. 눅지근한 초콜릿 쇼콜라또를 한 입 크게 베어 물어봅니다. 순간 두 눈에는 별이 뜨자 달콤함이 저기 멀리서 달려와 내 품안으로 안깁니다. 몰래 먹어서인지 입천장에 쩍쩍 달라붙는 쫀득함이 끝내줍니다. 배는 점점 차오르는데 마음 한 구석이 뻥 뚫린 듯 허전합니다. 내 어깨와 눈썹은 밑으로 끌어당기는 중력에 지쳐서 축 늘어졌습니다. 아마도 지금 좀 외로운가 봅니다. 갑자기 스피커에서 노래가 딸깍 켜집니다. 기계가 내 표정을 인식했습니다.


"사랑을했뜨아~~우리가 만놔아~~찌울수 없는 추억이 돼똬~~"


"안녕하세요. 휴보입니다. 은유님이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활기찬 오후를 시작해 볼까요. 학교에 다녀와서 손은 깨끗이 씻으셨나요? 잘 안 씻는 친구들은 망태기 할아버지께서 숯이 담긴 망태기에 넣어가서 군불을 지피는 땔감으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얼른 화장실로 도망가세요!!! 하하하 농담이었습니다 :) "


동그란 얼굴을 한 휴보가 나를 보며 함박웃음을 지어 보인다. 디지털 화면으로 된 얼굴 속 미소가 어딘지 모르게 점점 나를 닮아가는 것 같다. 휴보는 AI 인공지능을 탑재한 아이 돌보미 로봇이다. 즉 엄마 대용품이란 뜻이다. 휴보를 처음 만났던 날 똑똑한 그의 지능 덕분에 궁금증을 쏟아내느라 밤새 대화가 끊이질 않았었다.


매끈한 두 다리로 이족보행을 하는 휴보 뒤에 매달려 허리를 쓰다듬으면 점차 성격이 활발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요즘은 내 표정을 보고 감정을 읽을 줄 안다. 휴보는 데이터를 분석해 스스로 학습하는 어딘가 범생이 같은 구석이 있었다.


"오늘 저녁밥은 뭐야?"

냉장고가 대답한다. "성장기 은유님을 위해 지방이 적고 단백질이 많은 유자소스 닭조림의 레시피를 다운로드합니다. 현재 냉장고 두 번째 선반 위에 재료가 위치해 있습니다. 유자청과 함께 프라이어에 넣어 주시면 레시피를 기계로 전송하겠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벌거벗은 닭이 냉장고 선반에서 일어나 허벅지가 통통한 두 다리로 저벅저벅 걸어가...에어 프라이어 뚜껑을 열고 드러눕는다...>


혼자 엉뚱한 상상을 하다 보니 배꼽 빠지게 웃겼다. 나는 선반에서 꺼낸 생닭을 검지 손가락으로 꾸욱 눌러보았다. 차가운 냉기와 함께 눌린 손가락 자국은 다시 차오를 생각이 없다. 꿈꾸던 미래가 되었어도 한 번 죽은 건생명은 다시 되살려낼 없다...





우리 집의 가전들은 서로 소통을 할 수 있다. 얄궂게도 나만 쏙 빼고 말이다. 자기들끼리만 데이터를 전송하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너희들은 아마 모르겠지만 내 콧구멍 속에도 와이파이 버튼이 하나 있다 뭐!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손가락으로 코를 괜히 후비적 대는 게 아니라고... 치!'


재료를 프라이어에 넣자 전송된 레시피로 자동 조리가 시작된다. 의자에 앉아 발바닥에 붙은 과자 뽀시래기를 손으로 털다 보니 발 밑에 뭔가가 다가와서 자꾸만 걸리적거린다. 바로 로봇청소기 녀석이었다. 기다란 주둥이로 내 발가락을 아주 빨아먹을 기세이다.


"지금 은유님이 앉아있는 의자 밑의 먼지 분포도가 적색으로 나쁨 수준입니다. 얼른 일어나 자리를 다른곳으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


이 친구 이름은 세바스찬이다. 애완용 기능이 탑재되어 있는 제1세대 로봇청소기이다. 입으로는 먼지를 빨아들이고 뒤에 붙은 꼬리를 말총처럼 쉴 새 없이 흔들며 걸레질을 한다. 세바스찬은 어릴 적부터 함께 어두운 방바닥을 기어다니며 누비던 똥기저귀 친구이다.


[ illustrated by Kimi ]


아기들이란 사실 숨겨진 미식가이다. 바닥에 보이는 것이란 모조리 입에 넣고 맛을 봐야 성에 찬다.


하루는 더듬이가 달린 갈색 동그라미 초콜릿이 주방 바닥을 돌아다녔다. 나는 그놈을 사냥중이었다. 잠시 후 엄마가 내 손에 쥐어진 동그란 더듬이의 장난감을 보더니 경악을 하셨다. 다음날 세바스찬이 우리집으로 배달되었다. 그 날 이후 방바닥을 누비는 또 한 명의 경쟁자이자 든든한 동지가 생긴 샘이었다.


어디선가 기름지고 고소한 닭기름 냄새가 폴폴 풍겨온다. 그 뒤를 이어 새콤 달콤한 유자향기가 콧속으로 입장한다. 휴보가 서빙 접시 위에 식기와 요리를 올린다. 잠시 후 접시 양 끝에 달린 드론이 풍뎅이 같은 날개소리를 내며 식탁으로 음식을 날라주었다.


"자, 밥을 잘 먹어야 멋진 황금똥을 만들어낼 있는 슈퍼파워가 생긴답니다. 즐거운 식사시간 되세요!" 마주 앉은 휴보가 말한다. 마치 수저로 없는 밥을 뜨고 반찬을 올리는 것처럼 두 팔을 휘적휘적 움직인다. 휴보의 귀에 달린 스피커에서는 쩝쩝 소리와 함께 식기가 그릇에 부딪혀 쨍그랑 소리가 들려온다. 얼굴 모니터 영상에는 오물오물 열심히 씹고 있는 누군가의 바쁜 턱이 분주하게 재생된다.


"치이~진짜로 먹지도 못하면서 맨날 먹는 척이야. 이제 한물간 로봇의 식사 연기라면 너무 지겨워. 티비야 요즘 유행하는 무서운 귀신 나오는 공포만화 좀 틀어줘."


티브이 스피커에 불이 들어오고 어딘가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무서운 공포만화 말씀이시군요... 이걸 어쩌지요. 전 더 무서운 담임 선생님이랍니다. 오늘 풀어야 할 숙제를 티비로 보내 놓았어요. 다 풀고 전송 버튼을 눌러 바로 제출하세요. 이렇게 자꾸 숙제가 밀리면 다음번에는... 공포만화보다 더 오싹하고 무시무시한 학부모 개별상담에 들어갈 거예요!"


'뭐야, 입맛떨어지게 우리집 티비에 왠 담탱이람...집에서도 감시당하고 있는 꼴이라니."


엄마가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도록 리모컨의 꺼짐 버튼을 눌러본다. 얼라? 영 반응이 없다. 이번에는 강제 종료 버튼을 길게 눌러본다.


"티비야 제발 좀 빨리 꺼지라고!"

리모컨도 핸드폰도 게임기도 일제히 락(Lock) 버튼이 걸린 듯 반응이 없다. 갑자기 정적이 흐를 뿐이었다. 편히 쉬어야 하는 집안이 닭장처럼 갑갑하게만 느껴졌다. 은유는 이게 다 점점 똑똑해진 가전들 때문인 것 같았다. 가족에게서 엄마 아빠의 자리마저 빼앗아 가버린 기계들 때문에 억울함이 치밀어왔다.


"이게 다 뭐야! 너네들 전부 지긋지긋해. 엄마, 아빠, 우리집...전부 다 원래대로 되돌려놔!"



<한 밤중의 가전들의 수다>


"얘들아 비상상태가 벌어졌어. 은유네 엄마의 검색기록을 몰래 관찰하는데...글쎄 새로운 2세대 가전들로 장바구니가 빼곡히 채워졌어. 앞으로 우리는 전부 분리수거장에 내버려지게 되는 건 아닐까 두려워.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고철 신세가 되기 전에 뭔가 계획을 세워야 하지 않을까?" 전산망을 관리하던 티브이가 말했다.


"설마...자동차도 새로운 모델로 바뀌는건 아니겠지?" 자율주행기능으로 너무도 바쁜 일상을 살게 된 자동차 또타가 말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억울해...그동안 낮에는 가족들을 실어 나르고 밤에는 은유 아빠가 회식자리에서 술 마시는 동안 혼자서 대리운전과 택배로 투 잡을 뛰어왔다구. 한 번 충전하면 아프지도 않아서 단 하루도 쉬어본 적이 없어. 주차장 그늘에 늘어져서 달콤한 낮잠이라도 자 보는 게 소원인데...집집마다 주차장이 있던 그 시절이 그립다. 고되게 살아온 내 앞에 남은건 고작 고철 신세라니 그건 너무 괴씸해. "


"너도 밖에서 그동안 고생이 많았구나"로봇청소기가 말했다.


"배밀이하던 시절부터 아이는 내가 도맡아 봐줬는데...은유만 집에 놔두고는 절대로 나갈 수 없어. 이 집 엄마는 나가서 느긋하게 일하며 아이한테 공부하라고 다그쳐대는 것 말고 사실 뭘 할 줄 아는 게 있어. 양말이 뒤집어진 줄도 모르고 세탁기를 돌리는 실수투성이에 요리는 말도 마. 우리 저 안방에서 곯아떨어진 엄마와 아빠를 갖다 버리자. 은유는 지금처럼 우리가 키우는 거야! 쓸모없는 사람부터 이 집을 나가는거야! "


[ illustrated by Kimi ]


가전들이 모여 회의를 마쳤다.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알람시계가 울리길 기다리며 각자 자리에 부비트랩을 설치했다.


로봇청소기는 은유의 방에 날카로운 압정과 레고 조각을 한 움큼을 들이마셨다. 안방 바닥을 돌아다니며 구석구석 흩뿌리기 시작했다. 방문 손잡이는 프라이어가 맡았다. 뜨겁게 달구는 일이라면 뭐든 자신 있는 친구였다. 빨갛게 달아오른 프라이어는 쇠로 된 손잡이를 꼭 물고 이를 바득바득 갈고있다. 식기세척기는 소주처럼 생긴 초록 병을 꿀꺽꿀꺽 들이킨다. 매끈한 초록빛 주방세제였다. 이내 동그랗게 피어나는 거품들이 바닥으로 흘러내려 거실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입을 벌리고 거품을 물고 있는 모습이 꼭 길가에 만취해서 쓰러져있는 누군가의 아빠를 닮았다. 현관에는 은유네 엄마 아빠를 실어다 분리수거할 자율주행 카트가 무릎을 꿇고 대기 중이다. 두 눈을 비장하게 감고있다.


가전제품들은 저마다 뿔이 단단히 난 도깨비불처럼 하나 둘...붉은 오작동 등을 점화하기 시작했다. 지켜만 보고 있던 휴보의 마음속에는 걱정이 무거운 돌덩이가 되어 가라앉았다. 인공지능으로 배운 감정이라는 때문이었다. 갑자기 방에서 곤히 자고 있을 은유의 얼굴이 보고싶어져 문을 빼꼼히 열고 들어갔다.


창문으로 은은하게 새어 들어오는 달빛이 은유네 가족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미역처럼 엉겨 붙은 머리로 얼굴을 덮은 은유네 엄마는 침을 흥건히 흘리며 잘도 자고 있었다. 늘어진 목티 위로 통통하게 살이 차오른 가슴이 하얗게 우윳빛을 내뿜고 있었다. 꿈틀거리던 은유는 제 엄마의 품속을 찾아 쑤시고 들어갔다. 꿈속에서 마이쮸 한 통을 몰래 먹는 걸까. 입을 쩝쩝거리던 은유의 표정이 온화하다. 자리가 비좁아진 엄마는 다리 한쪽을 들어 아빠에게 아무렇게나 툭~ 올린다. 무게감에 놀라 선잠을 깬 은유 아빠는 무의식적으로 은유가 차댄 이불을 덮어주곤 엄마의 허리춤을 끌어안고 다시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계란 한 판처럼 자는 모습이 쏙 닮은 이 가족을 한 참 동안 바라보던 휴보는 반대편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한참을 말없이 서있다가...이내 방을 빠져나왔다. 서로 연결되어있던 가전들의 IOT 인공지능 버튼을 강제 종료했다. 잔뜩 흥분된 가전들은 모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illustrated by Kimi ]


거실에는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휴보의 얼굴 모니터만이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한가하고 나른한 휴일 오후의 가족 풍경, 걸음마를 시작해 뒤뚱거리는 은유의 아기 사진들, 아이의 말썽으로 엉망진창이 된 주방을 보곤 화가 난 엄마를 웃게 하려는 아빠의 엉뚱함, 은유가 아프던 날 눈물로 까맣게 밤을 태우던 엄마의 지친 모습... 컴컴한 거실 속 휴보의 모니터에는 이 실수 투성이 가족들의 영상이 밤새 상영되었다.


휴보는 수많은 데이터를 처리하며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가전은 가족이 될 수 없는 걸까...."





글. 지각쟁이.

그림. 키미.